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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1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9-13 조회수 : 499

9월 13일 [한가위] 
 
요엘 2,22-24.26ㄱㄴㄷ
요한 묵시록 14,13-16
루카 12,15-21 
 
"사람의 생명은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 
 
< 탐욕의 끝 >

남미를 여행할 때 잉카인들의 유물들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금이 많아서 짐승까지도 금으로 장신구를 만들어 치장시킬 정도였습니다.  
 
그들에게 금은 단지 몸을 치장하는 금속일 뿐 그것이 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금은 해님의 땀, 은은 달님의 눈물로 불렸습니다. 
그들에겐 돈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모든 가치는 노동력으로 측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1532년 피사로라는 사람이 엘도라도의 전설을 찾아 잉카를 찾았습니다. 
엘도라도는 금으로 치장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금이 가득 찬 연못일 수도 있고 금으로 된 산일 수도 있습니다.  
 
까하마르까 전투를 거친 후, 안데스 산맥의 볼리비아 포토시에서 현재까지 채굴된 은은 
62,000톤입니다.  
 
당시 잉카인들은 왜 유럽인들이 금과 은에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럽인들에겐 금과 은은 휴대할 수 있는 권력이며 가치의 저장소이고 계산의 단위였습니다.  
 
스페인사람들은 강제 노동제를 적용하였는데, 포토시에 들어간 사람 8명 중 1명은 살아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약탈당한 잉카인들을 포함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거의 멸종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렇게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금과 은을 들여온 스페인은 더 부유해졌을까요? 
그 당시는 스페인 경제가 살아나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내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고 경제는 매우 힘들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은을 많이 들여오면서 그 값어치가 떨어지는 반면 물가는 치솟았기 때문입니다. 
이내 은화는 쓰레기처럼 취급되게 되었고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해졌습니다.  
 
탐욕은 타인만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종국엔 자신까지 죽입니다. 
어떤 탐욕스런 논의 주인이 위에서 내려오는 물을 자신만 받아쓰고 밑으로 흐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논으로부터 물을 받아야 했던 논들의 벼는 약해져서 병이 들게 되었습니다. 
쌀값이 오를 것을 기뻐하던 탐욕스런 주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밑에서 시작된 병충해가 자신의 벼까지 모두 죽이게 된 것입니다. 
내가 더 가지면 그만큼 타인이 적게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탐욕은 폭력입니다. 
그런데 탐욕은 결국 자신까지 죽이게 되어있는 자신에 대한 폭력이기도 한 것입니다. 
내가 벌어 내가 쓴다는데 무슨 폭력이니 죄이니 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게으르고 나는 부지런하고 그들은 흥청망청 쓰고 나는 절약해서 부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마존 부족이나 혹은 북한에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살 수 있을까요? 
성경의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부자였다는 이유만으로 지옥에 가게 됩니다.
부자인 것 자체가 어쩌면 폭력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부자일 수는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누군가를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재화가 돌아가게 하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진 사람은 그만큼 더 나누어야 하는 의무까지 함께 주어지는 것일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내어주는 호수입니다. 
자신도 생명으로 가득 찼고 주위도 생명으로 가득 찼습니다.  
 
반면 갈릴래아로부터 물을 받아들이는 사해는 그 반대입니다. 
내어주지 않습니다. 
자신도 죽였고 물을 쪽쪽 빨아들이기 때문에 주위도 황량한 소금사막으로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노력해서 내가 많은 돈을 쌓아놓겠다는데 그것이 무슨 문제냐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가진 것을 내어놓지 않으면 분명히 누군가에게는 피해를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래아 호수가 받아들인 물을 강물을 통해 내어보내야 하는 것이 의무인 것처럼 무언가를 가진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혼자서 살게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보듯이 지나치게 탐욕을 내어 쌓아놓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는 교만이 숨어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 안에서 부자가 창고를 늘리는 바로 그날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물을 쌓아놓는 이유는 내일도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관자는 하느님이십니다.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생각하기에 내일도 당연히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총량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세상 것은 믿을 수 없고, 세상 것을 믿으면서 하느님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믿는 것과 한 운명을 맞는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붙잡고 있으면 영원할 수 없습니다. 
가라앉는 배를 꼭 쥐고 있으면 그 배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갈릴래아 호수처럼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가진 것을 내어줄 줄 알아야합니다.  
 
그렇지만 가진 것을 나누기만 한다면 무엇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어떻게 나눌 줄 아는 사람에게 더 많이 채워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밭에 밀알 하나가 떨어지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내가 나누는 것은 수십 배의 보상으로 돌아옵니다. 
 
어느 마을의 최 부자 가문은 오랜 세월을 부자로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가훈이 ‘돈은 똥이다’라는 이유였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으면 썩어서 나에게 해를 입히지만 나누면 거름이 되어 더 많은 이익이 되어 돌아온다는 진리를 품고 있습니다. 
나누는 사람을 굶게 만드시는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나무가 참나무라고 합니다. 
참나무는 잎도 약으로 쓰이고 나무는 단단하여 목재로 쓰입니다. 
그리고 오래 타서 불을 때기에도 좋고 숯은 참숯을 알아줍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내어준다면 사람들이 더 많이 베어서 멸종이 되어야할 텐데 어떤 나무보다도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내어놓는데 있습니다.  
 
가뭄이 들면 더 많은 도토리를 맺는 참나무는 
음식이 부족할 때 동물들에게 더 많은 식량을 제공합니다. 
동물들은 그것들을 나르다가 놓치기도 하고 다람쥐는 자신이 파묻어놓은 도토리들을 많이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것들이 모두 땅에서 자라나 나무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내어주면 더 많이 받게 되어있는 것은 하늘의 이치고 자연의 이치인 것입니다. 
신앙인에게는 모든 재물이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웃들에게 흘러가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막아버리면 하느님께도 이웃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피가 흐르지 않으면 죽듯이 모든 것도 나에게 들어와 다시 나가지 않으면 썩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풍요로운 한가위, 우리 모두가 풍요롭게 되는 길은 바로 나눔뿐입니다. 
풍요를 위해 가두어 놓은 것을 열어 세상을 비옥하게 합시다.  
 
어떤 부자 가문은 돈을 똥으로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머물러 있으면 내 안에서 썩어버리지만 밖에 뿌려지면 곡식이 많이 달려 풍요롭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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