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일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테살로니카 1서 4,13-18
루카 4,16-30
< 인색하고 교만하면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
빌립보 네리는 16세기의 아주 훌륭하고도 지혜로웠던 성인입니다.
어느 날 교황은 로마 부근 수도원에 있던 어느 수련 수녀가 갈수록 명성을 얻게 되자 네리를 시켜 그 이유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그녀는 성녀로서 평판이 나 있었습니다.
네리는 노새를 타고 한겨울 진흙과 수렁 속 길을 달려 수도원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사람을 시켜 그 수련 수녀를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녀가 방에 들어왔을 때, 그는 그녀에게 오랜 여행 때문에 진흙범벅이 된 그의 신발을 벗기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네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수도원을 떠나 로마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교황에게 말했습니다.
“이젠 놀라실 것 없습니다. 거기는 성녀가 없어요. 왜냐하면 겸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믿음이 강할 수 있을까요?
겸손한데 내어주지 않을 수 있을까요?
자신을 내어주지 못하면 겸손하지 않은 것이고 겸손하지 않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겸손과 사랑과 믿음은 하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자렛으로 가시어 아버지로부터 주어진 당신 소명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자신들이 오래전부터 보아오던 예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 안엔 선입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선입관은 교만에서 나옵니다.
사람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방향으로만 변해야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자신도 스스로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변하고 행동하는데도 남은 자신들의 틀에 맞히려는 모습이 교만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 오히려 큰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해서 박사를 따도 믿음을 잃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을 증가시키려면 공부와 함께 겸손도 증가시키려 노력해야합니다.
예수님은 나자렛 사람들이 왜 당신께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엘리야 예언자를 받아들인 사렙타 과부의 예와 시리아 장수 나아만의 예를 통해 알려주십니다.
엘리야는 삼년 반 동안 기근이 들어 이스라엘에 비가 내리지 않을 때 시돈지방의 한 과부를 찾아갑니다.
그 과부는 자신도 먹을 것이 없었지만 엘리야에게 자신의 먹을 것을 나누어줍니다.
나의 것을 내어주는 것은 겸손의 표현입니다.
어차피 내 것은 없다는 믿음이 있어야 내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까지 자신들의 것이라 여겼습니다.
나의 것이라 여기는 것은 교만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 것입니다.
시리아 장수 나아만은 시골의 한 예언자 엘리사의 말에 순종할 줄 알았습니다.
요르단 강 물에 일곱 번 몸을 담글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물에 일곱 번 담근다고 나병이 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손해 볼 것이 없다고 믿어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은 자존심 하나뿐입니다.
따라서 자존심이 꺾이는 것은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 겸손이 그의 나병을 낫게 하였습니다.
평생을 흑인들을 위해 수고한 슈바이처 박사가 밀림에서 처음으로 병원을 지을 때
한 번은 옆에 서서 구경만 하는 흑인 청년에게 서 있지만 말고 같이 일하자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이 흑인 청년은 말했습니다.
“나는 그런 일 안 합니다. 나는 배운 사람입니다.
그런 일은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하는 것입니다.”
“나도 학생 시절에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지.
그러나 공부를 더한 다음에는 아무 일이나 다 하게 되었다네.”
공부의 목적은 겸손을 증가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공부를 하고 궁극에 가서는 믿음을 잃게 됩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는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만함을 없애는 방법은 내어줄 줄 아는 마음,
순종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잘 내어줄 줄 알고 겸손했다면 예수님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어주는 연습, 순종하는 연습은 그래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겸손을 통해 더 큰 믿음을 갖게 만드는 열매가 맺힙니다.
왜 십일조를 해야겠습니까?
그것을 하다보면 결국 예수님을 맞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죄가 되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순종해야겠습니까?
그 겸손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꼭 공부만으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공부는 오히려 교만을 부추깁니다.
그러니 모든 노력의 지향을 겸손에 두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많이 배워도 손해 보는 것입니다.
공부보다 자선이 더 중요하고, 공부보다 순종이 더 중요합니다.
공부는 진리를 얻고자 하는 것일 진데, 정작 겸손한 자만이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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