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연중 제22주일]
집회서 3,17-18.20.28-29
히브리서 12,18-19.22-24ㄱ
루카 14,1.7-14
< 선생님 병 >
‘리듬’의 저자 김상운씨에게 한 여직원이 파김치가 되어 와서 시댁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시어머니는 정말 못 말려요. 제가 하는 일엔 무조건 트집부터 잡으니까요.”
명절에 그녀는 동서들과 의논하여 갈비를 준비해 갔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먹어보지도 않고 대뜸 “이거 호주산 갈비 아니냐? 값은 싸지만 맛이 별로더라.”라고 트집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왜 맛없는 싸구려 갈비를 사왔냐는 소리입니다.
반찬을 상에 올려놓자 “작은 접시에 이게 뭐냐? 큰 접시에 담지.”라고 핀잔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파전을 부쳐놓자 쓱 보더니 “웬 계란을 이렇게 쏟아 부었니? 이게 계란전이지 어디 파전이냐?”
하고 면박하였습니다.
시어머니가 여러 동서 중 유독 자신만을 표적으로 삼는다고 생각하니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습니다.
시댁이란 말만 들어도 골치가 아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니 남편은 역시 남의 편이었습니다.
“설마 어머니가 당신만을 차별대우하시겠어? 왜 생각이 그렇게 유치해?”
내 편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시어머니와 감정이 나빠지니 남편과의 관계도 자꾸 틀어졌습니다.
김상운씨는 그냥 시어머니 장단에 맞장구를 쳐 주라고만 했습니다.
예컨대 “이거 호주산 갈비 아니냐? 값은 싸지만 맛은 별로더라.”라고 말하면, “어머님도 그런 생각이시죠? 혹시나 해서 한 번 사왔는데 다음에는 역시 한우가 낫겠어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어머니의 공격은 거기서 끝납니다.
“그래... 그럼 한 번 먹어나볼까?”
또는 “작은 접시에 이게 뭐냐? 큰 접시에 담지.”라고 말하면, “역시 어머니 말씀이 맞네요. 큰 접시가 낫겠어요.”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이럴 것입니다.
“뭐, 일단 담았으니 흘리지 않게 조심히 먹자.”
우리는 일상에서 이런 상황을 너무도 많이 접합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우리 모두는 ‘선생님-학생’ 놀이를 하기 때문입니다.
시어머니는 당연히 선생님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어떤 며느리가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면 누가 선생님인지 가려보자고 그러는 것입니다.
파전에 계란을 많이 넣든 안 넣든 “제가 학생입니다.”라는 반응을 보이기 전까지는
이 싸움은 멈추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요즘은 이게 대세예요.”라고 말했다가는 또 다른 공격을 감당해야합니다.
개가 서로 으르렁 댈 때는 서로 그냥 싸우게 해서 서열을 정해주면 됩니다.
내가 학생이 되려하면 싸움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존경스러운 선생님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학생임에도 선생님이 되려고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학생 자리에 앉아는 있지만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니 가르치려고만 드는 선생님이 그렇게 존경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참으로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선생님은 왠지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어서 좋아하게 됩니다.
다 선생님이 되려고 하지 학생이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사제나 선생님, 혹은 상담사 등과 같이 이미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버린 이들은 이 심각한 ‘선생님 병’에 시달립니다.
강론 시간도 아닌데 계속 가르치고 있는 말투로 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대가는 외로워지는 것입니다.
저도 “왜 가르치려고만 들어요?”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냥 하던 일이 일상에서도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외로워질 것인지, 학생의 자리를 차지하고 사랑받는 사람이 될 것인지 결정해야합니다.
남편이 “그러게, 당신 말이 맞는 거 같아. 요즘 어머니가 유독 그러시네?” 라고 말해서 아내에게 사랑받던지, “당신도 잘못하는 게 있으니까 어머니가 그러시겠지.” 라고 충고를 주어서 미움을 받던지 둘 중 하나를 결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식사 자리에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이들을 비유말씀으로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항상 맨 끝자리를 차지하려고 노력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윗자리에 앉게 된다는 것입니다.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면 끝으로 밀려납니다. 이것이 이치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선생님이 되려고 하면 나중엔 학생의 자리로 밀려날 것이고 학생이 되려고 하면 선생님으로 추앙받을 것입니다.
이 단순한 진리를 모두 알면서도 잘 실천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상대보다 내가 낫다는 교만 때문입니다.
미국 대학생들에게 천국에 갈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을 대라고 했더니 마더 데레사가 천국에 갈 확률이 가장 높을 것 같다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과연 몇 명에게서 표를 얻었을까요? 75% 정도였습니다.
평생 가난한 사람만을 위해 살아온 마더 데레사도 75% 정도만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은 천국에 들어갈 것 같느냐는 질문에는 거의 95%가 그럴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마더 데레사보다는 잘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선생님이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만약 상대가 잘못하는 것을 보고도 알려주지 말아야하나요?”
당연히 알려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언자직’이란 것이 있습니다.
예언자직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이지 내 기분대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이 상황에서 주님께서 이런 말씀은 해 주어야 한다는 확신이 있어야하고 성경에서 해 줄 말을 찾아야합니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을 미워해도 감수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예언자직이 아니고 그냥 선생님 놀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직을 수행해야 할 때는 살아가면서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냥 끝자리에 앉으려고 노력하는 그 겸손한 모습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참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회가 되는대로 끝자리를 차지합시다.
굳이 한 번 가르치자고 선생님 자리를 탐내다 평생 미움 받으며 살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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