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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2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8-28 조회수 : 569

8월 28일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테살로니카 1서 2,9-13 
마태오 23,27-32 
 
<​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 
 
어떤 시골 본당 신부님과 신자들은 힘겹게 성전 건축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도시 본당에서 팔고 다녔지만 건축자금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엔 서울에서 이사와 전원주택을 크게 짓고 사는 연세 든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그 자매님이 어느 날 본상 신부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제 사랑이(개)에게 세례를 주실 수는 없나요? 
그러면 제가 건축헌금으로 10억 봉헌하겠습니다.” 
 
신부님은 말도 안 되는 제안에 바로 거절하려 했으나, 워낙 공사대금 지불이 다급한지라 
잠시만 기다리라고 해 놓고 주교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냥 눈 딱 감고 몰래 세례를 주면 아무 문제없을 것이라고 주교님을 설득했습니다. 
그러자 주교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음 ... 전 신부, 그럼 ... 견진은 내가 준다고 그래.” 
 
물론 우스갯소리지만 여기서도 배울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발각이 되지 않도록 그런 사람이 아닌 척 하고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잘못이 없다면 그런 사람이 아닌 척 할 필요가 없지만 잘못이 있다면 반드시 그런 사람이 아닌 척 하게 됩니다. 
그렇게 죄를 지으면 자연적으로 위선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삼일 연속 바리사이-율법학자의 특징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위선자들입니다. 신앙생활은 남보다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원에서 멀어져있는 이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바리사이-율법학자이기 때문에 그 습성에서 벗어나려 노력해야합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의 첫 번째 특징은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다 지키지만 그 율법의 정신인 사랑은 실천하지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겠다고 돌아다니면서 정작 기도는 하지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성경은 열심히 읽지만 영성체는 하지 않는 것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봉사는 하는데 성체조배 할 시간이 없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중 하느님의 친교를 이루는 시간이 가장 중요합니다. 
필요한 것은 그것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하는 일의 목적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십일조를 내면서 하느님을 주님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십일조는 선악과와 같습니다. 
선악과를 남겨놓으라고 하신 이유는 하느님께서 드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선악과를 봉헌함으로써 아담과 하와가 당신을 주인으로 인정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거 바친다고 하느님께 아무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주시는 것들에 대해 감사하고 
주님을 진짜 주님으로 인정하게 하기 위한 우리들을 위한 도구였습니다. 
 
미사는 사랑해야 함을 알고 사랑할 힘을 얻기 위한 목적인데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미사하면 바리사이-율법학자인 것입니다. 
하는 일의 목적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미사나 기도를 많이 드린다고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을 통해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마지막 바리사이-율법학자의 세 번째 특징은,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고 계신데, ‘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것입니다.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썩고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정신을 자기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더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칭찬해주면 기뻤다가 인정을 받지 못하면 죽을 듯이 괴로워하고 
화를 내고 분노를 터뜨립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하다면 바리사이-율법학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다른 사람의 평가에 민감한 이유는 이미 하느님께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 떨어진 평가를 다른 사람들에게라도 채우려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양심은 하느님께서 넣어주신 법입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나를 인정해주시고 그러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하던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됩니다. 
 
페이스 북의 마크 주커버그는 한 가지 옷만 입습니다. 
그리고 왜 다른 옷은 없느냐는 비아냥거림에 아무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는 그 사람보다 더 부자임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또 옷이 자신의 내면의 아름다움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가난하다고 자신을 평가하는 사람은 돈이 많게 보이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보아주지 않으면 분노를 터뜨립니다. 
 
내 양심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러면 남들이 비난을 하던 비웃던 조롱을 하던 멸시를 하던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이웃을 판단할 겨를이 없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면 볼수록 자신보다 더 많은 죄를 짓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남을 심판할 수 없고 또 그래서 남이 그렇게 심판해도 그저 “알아!”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항상 양심의 거울을 나의 앞에 놓고 그 거울을 통해 나만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그래야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때에는 주님 앞에 너무 부끄러운 것이 많아 고개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겐 남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내면에 썩어가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내 냉장고의 음식이 썩어 가는데 누구의 냉장고를 신경 쓸 수 있겠습니까?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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