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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2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8-25 조회수 : 565

8월 25일 [연중 제21주일] 
 
이사야 66,18-21
히브리 12,5-7.11-13
루카 13,22-30 
 
< 좁은 문은 힘들면서도 기쁘다 > 
 
‘봉오동 전투’(2019)는 우리 독립군들이 일본 정규군에 맞서 처음으로 승리한 감동적인 역사를 그렸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가 더 잘 살게 해 주겠다고 이 집에 들어왔는데 왜들 난리냐고.  
 
그러나 독립군들은 말합니다. 
남의 집에 들어와서 아내 자식 재산 다 차지하고 다 너희를 위한 일이라니 그것에 무슨 말이냐고. 
그래서 그 침입자를 몰아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이때 일본 군인들은 마치 여우를 사냥하는 것처럼 교만해있었습니다. 
독립군들은 그들의 교만함을 이용해 계속 화를 북돋아 도망칠 곳이 없는 분지 안까지 끌어들입니다.
그 가운데서 큰 희생도 치러야했습니다.  
 
숫자가 부족한 까닭에 몇몇의 사람들이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일부러 포로가 되어 무수한 고문을 받으며 잘못된 정보를 흘려야 했고, 혼자서 그들을 유인하기 위해 총알받이가 되기도 해야 했습니다.
이들 덕분으로 정규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일반인들이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전쟁경험과 군사훈련으로 무장되고 최고급 무기를 가진 이들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 원동력은 자신들이 미끼가 되어 그들의 열을 바싹 오르게 했던 희생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희생 뒤에는 승리의 기쁨이 서려있었습니다. 
그 전투로 일본군은 157명이 전사했고 300여명이 부상을 입어 총 45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독립군 피해는 사상자가 총 10여 명이었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지는 십자가를 통해 이러한 결과가 나올 것을 기대하던 그들은 십자가를 지는 동안에도 이미 부활의 기쁨을 맛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구원받을 사람은 적겠느냐고 물어봅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도 실제로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구원 받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뜻을 넘어서서, 또한 구원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도 동시에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직 ‘좁은 문’의 의미를 모릅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미사에 나오고 봉사와 선교도 열심히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들은 열심히 신앙생활 했는데도 좁은 문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고 하신 걸까요?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기쁘지 않았습니다.  
 
얼굴 찡그리며 신앙생활 했던 것입니다. 
좁은 문은 그 자체로 그 뒤에 에덴동산의 약속이 있기에 그 문으로 가면서도 기쁩니다. 
힘들지만 기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신앙생활을 했기에 힘들기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가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길을 알려주시러 세상에 오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이 곧 좁은 문입니다.  
 
그러니 좁은 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가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은 십자가인데 십자가의 길엔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 이루었다.”는 기쁨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십자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편하게 살아도 구원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상급이기에 노력 없는 상급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가는 사람은 아직 상은 받지 않았지만 상을 받기로 약속이 된 사람처럼 
이미 부활의 기쁨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으로 내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지,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카인과 아벨이 하느님께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카인의 제물은 물리치시고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에 카인은 기분이 나빴고 아벨은 기분이 좋았습니다.  
 
기분이 나쁜 카인은 아벨을 살해하였지만 아벨은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아벨은 항상 상급을 기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넓고 편한 길로 가려는 사람은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항상 기분이 나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상급을 기대하기보다는 벌 받을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의 행실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벨은 자신이 잘하고 있는 것을 하느님께서 보아주시니 당연히 ‘언제 상을 주실까?’라는 기대에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물 한 컵의 선행에도 반드시 상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다면 반드시 기분이 좋아야합니다. 
물론 힘들고 어렵지만 이것은 운동할 때 힘들고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그 힘들고 어려운 것보다 더 큰 기대와 행복이 그를 계속 뛰게 만듭니다. 
더 건강해지고 또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일면으로 고통스러운 마음도 있으셨지만 부활의 영광을 기대하고 계셨습니다. 
당신 수난을 예고하시며 동시에 부활을 말씀하지 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항상 받을 상에 대한 기대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할 때 
‘오늘은 주님께서 어떤 상급을 주실 것인가?’란 기대를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조금 힘든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가 그렇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기대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 길이 좁은 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분 좋은 감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바로 하느님의 법칙을 따르면 됩니다.  
 
하느님은 항상 나를 기분 좋게 만드시려고 합니다.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하고 잘 했으면 칭찬해주십니다. 
그런데 죄를 지으면 자아는 상 대신 벌을 받을 준비를 하라고 말해줍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지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무엇을 사랑할 때 기분 좋아졌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사랑보다 강한 에너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보다 행복한 감정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주님께 상 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겨울 풍경화를 마친 화가가 몇 걸음 물러나 자기의 작품을 감상하였습니다. 
어디 하나 틀린 데가 없었습니다.  
 
나무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아래로 휘어진 듯 유연히 드리워졌고, 오막살이 처마 밑으로 고드름이 우아하게 내려져 있었으며, 
또한 땅위에는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신선한 눈송이가 조화 있게 화면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은 팔리지 않고 몇 개월 동안 화랑에 그대로 걸려 있었습니다. 
그 화가의 특징은 겨울 풍경화이었는데도, 아무도 그 그림을 사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는 옆에서 그림을 보고 있는 다른 화가에게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붓 가지고 계세요?”
그는 대답 대신 붓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붓을 받아들고는 몇 가지 색을 혼합하더니 듬뿍 찍어서 오막살이 창문에 붉은 빛을 덧칠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회색을 찍어 오막살이 굴뚝 위로 연기를 피워 올렸습니다. 
 
그러자 그 그림은 그 날로 팔려버렸습니다.
우리도 이 풍경화와 같습니다. 
내가 차갑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반기지 않아 더욱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따듯하게 해 주기 위해 노력하면 나도 사랑받습니다. 
 
사랑하십시오. 
물론 사랑하면 이웃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나는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그러나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질 것입니다. 
사랑 자체가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됩니다. 이 길이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가고 있다면 반드시 고통스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어떤 상을 주실까?’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상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기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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