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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2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8-22 조회수 : 536

8월 22일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판관기 11,29-39ㄱ
마태오 22,1-14 
 
< 선택되려면 > 
 
부모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 홀로 남겨진 남매가 있었습니다. 
누나는 중학교 2학년, 동생은 초등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동생은 부모의 사고 충격으로 갑자기 말을 못 하게 되었습니다. 
 
남매는 큰아버지에게 맡겨지게 되었습니다. 
큰아버지는 남매에게 폭력을 가했고 큰어머니는 누나에게 집안일을 시키며 학대하였습니다. 
다행인지 큰아버지가 폭력을 가할 때 동생의 입이 열렸습니다. 
 
“누나 때리지 마세요!”
누나는 그때까지 말을 하지 못하는 동생 때문에 고아원으로 갈 생각을 못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은 당장 큰아버지 집에서 도망쳐 고아원을 찾았지만 어떻게 가야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고민하던 누나는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매일 전화해주고 챙겨준 고마운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먼 지방에서 밤새 차를 몰고 와서는 남매의 형편을 보고 목 놓아 울었습니다. 
그리고 큰아버지 집에 가서 남은 짐을 챙겨 아이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자신의 자녀들이 다 출가하였기 때문에 아이들을 직접 키우기로 한 것입니다.
선생님은 남매에게 자신을 그냥 “엄마!”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누나는 금방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동생의 입에서는 차마 엄마란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동생은 조금씩 비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고 중국집 배달원을 하겠다고 집을 나갔습니다. 
 
선생님은 매일 학교가 끝나는 대로 중국집으로 찾아가 아이를 기다렸습니다. 
아이는 짜증을 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선생님이 중국집으로 가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하여 생명이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동생은 병원으로 가는 내내 눈물을 흘리며 
‘선생님이 살아만 나신다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아들이 되겠습니다.’라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다행히 석 달 동안 입원해 있다가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동생은 선생님을 극진히 간호하였습니다. 
선생님은 고생시켜서 미안하다고 계속 말했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화장실에 가야하겠다고 하며 동생에게 도움을 청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잠 깨워서 참 미안하다. 고마워.”
“엄마는 아들한테 미안한 게 왜 그렇게 많으세요?”
동생이 처음으로 뱉은 “엄마!”란 말에 선생님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선생님은 퇴직해서 주말엔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텃밭을 일군다고 합니다. 
누나는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고 동생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엄마가 피붙이도 아닌 자신들을 위해 천사가 되어주었듯, 두 남매도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작은 영혼들에게 촛불을 밝혀주는 작은 천사가 되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MBC 라디오 ‘여성시대’ 애청자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출처: ‘왓칭 2: 시야를 무한히 넓히려면?’, 김상운, 정신세계사] 
 
어떤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예배 때 이미 구원받았다고 믿고 고백하며 감사해합니다.  
 
그러나 삶이 그것을 증거하지 못한다면 무엇이 그 믿음을 증명해줄까요? 
자신의 죄와 의지적으로 싸우지 않는데도 정말 죄가 사해질 수 있을까요? 
 
위 이야기에서 동생이 진정으로 선생님을 “어머니!”라 부를 수 있었던 때는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을 때입니다. 
자신을 보살펴준 누나가 맞고 있는데도 한 마디도 안 하고, 또 선생님이 그렇게 돌보아주는데도 그에 합당한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실상은 그분을 어머니라 불러도 가짜일 수밖에 없습니다.  
 
삶이 변하기 위해 노력하게 만들지 않는 신앙은 가짜 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임금은 아드님의 혼인잔치에 아무나 초대합니다. 
처음 초대했던 이들은 오려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으려하지 않고 그분을 죽였습니다. 
이에 이방인들이 초대받게 됩니다.
그러나 혼인잔치에 초대받아 세례를 받은 이들 가운데서도 쫓겨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혼인예복을 갖추지 않은 사람입니다. 
혼인하는 날 잠옷 바람으로 왔다면 그것이 혼인 준비가 안 된 것을 증명해줄 것입니다.  
 
옷은 그 자리에 합당한 준비와 노력을 했음을 알려주는 도구가 됩니다. 
게다가 당시엔 초대하는 사람이 예복까지 준비하여 보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입지 않고 왔다면 그 자리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혼인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성체성사를 의미합니다. 
그 성체성사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은 세례 받은 이들입니다. 
그리고 혼인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견진성사를 받지 않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견진성사는 세례를 견고하게 하는 성사입니다.  
 
초대를 받았다면 그 초대에 합당하게 자신을 가꾸어야합니다. 
성령을 통해 마음의 덕을 키워 그리스도께서 사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 견진성사입니다. 
 
숫자 ‘40’이 견진성사를 의미하는데 이는 세례를 받고 죽을 때까지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상징적으로 세례를 받고 40일간 당신 자신과 싸워 아버지의 뜻이 당신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사탄과 40일 동안 싸운 기간이 곧 견진성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없이는 아버지와 온전히 한 몸을 이룰 수 없습니다.  
 
40일, 혹은 40년이 걸리더라도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부의 모습으로 변화되려는 노력 없이는 구원을 확신해서는 안 됩니다.
아기가 자신도 인간임을 아는 것을 세례라고 한다면, 두 발로 일어서려고 노력하는 것이 견진입니다.  
 
걸음마를 하고 옹알이를 하는 것은 자신이 부모처럼 되려고 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 것 자체가 믿음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늑대에게 아기가 키워지면 아기는 두 발로 걸으려하지 않습니다. 
인간이란 믿음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모에게 키워지면서도 두 발로 일어서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믿음이 생기지 않은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았다고 다 선택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선택 받으려면 성령의 힘으로 내 자신과 싸워 완덕을 입는 견진성사를 거치고 있어야합니다. 
 
끊임없어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고해성사를 통해 나 자신과의 싸움을 새로 시작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확신해도 됩니다. 
분명 성령께서 싸우게 하시는 것이고 그 사람 안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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