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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2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8-20 조회수 : 617

8월 20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판관기 6,11-24ㄱ
마태오 19,23-30 
 
< 잠을 죽음이라 생각하자 > 

우리나라에서도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인생수업’의 저자 퀴블러 로스 박사는 시사주간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 명입니다.  
 
그녀는 정신과 의사입니다. 
임종 직전의 환자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그들로부터 얻은 지식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죽음에 대한 문제를 끝까지 연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한 체험이 ‘죽음 이후의 삶(사후생)’에 나옵니다.  
 
죽어가는 환자들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게 되자, 
박사는 그 날 병원과 시카고 대학을 떠나겠다는 통보서를 제출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마지막 세미나를 마치고 승강기로 걸어갈 때였습니다. 
 
한 여성이 박사를 향해 다가왔습니다. 
박사의 모든 생각을 다 읽고 있다는 듯이 그녀는 함박 미소를 띠고 있었습니다. 
“박사님, 제가 딱 2분만 시간을 빼앗을게요. 사무실까지 함께 걸어가도 될까요?” 
 
이 2분이 그녀에게는 가장 긴 시간이었습니다. 
지금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는 여성은 1년 전쯤 세상을 떠난 슈와츠 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살짝 몸을 만져봤는데 실제 촉감이 있었습니다. 부인은 말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로 돌아왔어요. 첫째는 저를 위해 해주신 일에 대해 박사님과 스미스 신부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죠. 
더 진짜 이유는,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는 일을 아직은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과학자인 그녀는 자신이 죽은 사람을 보았다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에 
“그래요. 그런데 스미스 신부님한테 쪽지를 하나 써주시면 좋아하지 않으실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박사가 그 쪽지를 신부님에게 건네주지 않을 것을 환히 알면서도 친필 싸인까지 다 하고는 “이젠 됐나요?”하고 말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지 마세요. 아직은요. 지금은 때가 아니에요. 
우리가 도와줄게요. 때가 되면 아실 거예요. 약속하실 거죠?” 
박사는 “약속하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문 밖으로 나갔고 박사는 재빨리 문을 열어보았지만 복도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늘 나에게 죽음이란 것이 찾아오고 함께 걷게 된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
제대로 살게 됩니다. 
죽음은 모든 진실을 알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해집니다. 
힘들지만 조금이라도 더 나누기 위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접습니다. 
그렇게 퀴블러 박사의 좋은 책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퀴블러 로스 박사가 쓴 ‘인생수업’에서 그녀는 죽음을 앞둔 수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후회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돈을 더 많이 벌지 못한 것일까요? 더 열심히 일하지 못한 것일까요? 
더 많은 지식을 쌓지 못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하나같이 더 많이 춤추지 못하고 더 노래하지 못하고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더 행복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말하면 그것은 진리입니다. 
죽음은 곧 나의 시야를 왜곡시키는 자아의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방해 없이 죽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을 제대로 보게 됩니다. 
 
‘인생수업’에 나오는 한 죽음을 앞둔 아이의 사례입니다.
소년은 아홉 살 인생 중 여섯 해 동안 암과 싸웠습니다.  
 
어느 날 소년은 아버지에게 3년 동안 버려둔 채 차고에 세워져있던 자신의 자전거를 
꺼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의 가장 큰 소원은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이었지만 그때까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마치 영화처럼 느껴졌습니다. 
모퉁이에서 아이가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나타났습니다. 
끔찍할 정도로 파리하고 창백해서 아무도 그가 자전거를 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밝게 미소 지으며 우리에게 달려왔습니다. 
 
2주 뒤 소년의 1학년짜리 동생은 우리에게 
형으로부터 자전거를 선물로 받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형은 1년 뒤 동생의 생일에 자신이 곁에 있지 못할 것임을 알았나봅니다.  
 
삶의 시간도 기력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이 용감한 소년은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동생에게 자전거를 물려줌으로써 자신의 마지막 꿈을 이룬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런데도 부자가 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일’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는다.”(1코린 15,31)고 말합니다. 
오늘 죽는다면 오늘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주님께 나아갈 것입니다. 
 
잠은 죽음과 매우 흡사합니다. 
저녁 잠자리가 항상 내 생의 마지막이라고 여기시면 좋습니다. 
그러면 존재의 이유를 명확히 깨닫게 됩니다.  
 
우리 존재의 이유는 ‘행복’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행복하라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행복하려면 내어주어야 합니다. 
소유하면 어제 복음의 부자처럼 슬퍼집니다.  
 
초콜릿 맛을 전혀 모르면 초콜릿이 없는 것이 슬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맛을 아는데 조금밖에 없다면 슬픈 것입니다. 
그 조금을 나누어 먹을 수 있다면 다시 기뻐질 것입니다. 
그렇게 부자가 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매일 밤 맞는 잠을 죽음이라고 생각합시다. 
그러면 진리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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