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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1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8-11 조회수 : 579

8월 11일 [연중 제19주일] 
 
지혜서 18,6-9
히브리서 11,1-2.8-19
루카 12,32-48 
 
<​ 소명이라 믿어야 끝까지 간다 > 
 
저는 신학교 들어가면서부터 강론을 썼습니다. 
어차피 사제가 되면 해야 될 것이니 미리 연습하자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주일 강론은 써서 신학생 때부터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보냈습니다. 
지금 보면 매우 창피한 내용인데 제 나름대로는 잘 썼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제가 되어 유럽에서 사시는 여려 신자들을 보며 말씀에 목말라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싸이 월드’라는 매개체를 통해 강론을 나누었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서는 본당신부를 하면서 강론을 유튜브와 굿뉴스, 마리아 사랑넷과 같은 사이트에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강론을 쓰는 것이 매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교구청으로 들어가서는 강론 쓰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너무 편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불편했습니다.  
 
가진 것을 내어주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본당신부 하면 또 쓰면 되지, 뭐!’라고 스스로를 위로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라는 이 말씀이 마음에 계속 걸렸습니다.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이렇게 놀고 있다가 갑자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쓰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도저히 다시 쓸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백두산 천지를 올라갈 일이 있었습니다.  
 
백두산 천지를 보는 일은 쉽지 않다는 말에 
“주님, 제가 백두산 천지를 맑은 하늘 아래서 보게 되면 다시 강론쓰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라고 기도드렸습니다. 
올라갔는데 구름 한 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기도드렸습니다. 
 
“주님 제가 바란 것은 이렇게 너무 맑은 하늘이 아니고요, 
구름이 조금 흘러가는 그런 걸 말씀드렸던 겁니다. ㅎㅎ”
그리고는 또 강론을 안 썼습니다.
강론을 다시 쓰게 된 이유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라는 말씀이 자꾸 걸려서입니다. 
 
매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맞는 것입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소명’이라 부릅니다. 
목자가 양들에게 제 때에 양식을 주어야하는 일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주인이 맡긴 소명입니다.  
 
제가 강론 쓰는 것을 몇 년간이나 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을 소명으로 여기지 못하고 나의 선택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내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 때문에 심판받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해야만 하는 소명을 하지 않았다면 그것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제가 강론을 매일 써야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소명입니다.
그렇다면 평신도의 소명은 무엇일까요?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자신이 가진 것을 기쁘게 이웃에게 내어주라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제가 매일 강론을 써서 신자들에게 양식으로 내어주어야 하는 것이 소명이라면, 신자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하는 것이 소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심판을 위해 깨어있는 사람이 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성직자들이 아니라 먼저 평신도들을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한다.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마치 모기가 피를 빨아먹는 것을 소명으로 가지고 태어나듯,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피를 이웃을 위해 내어주는 소명으로 태어납니다. 
이 소명을 지니고 있으면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 자녀지위를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구원을 위해 끝까지 잃지 말아야하는 것은 기쁘게 나의 것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미국 소매상 협회의 조사 통계가 있습니다. 
판매원의 48%가 한 번 전화하고 포기하고, 25%는 두 번 전화해보고 포기하고, 15%는 세 번 전화해보고 포기한다고 합니다. 
즉 88%의 세일즈맨이 한 통 내지 세 통의 전화를 해보고 판매를 포기한다는 결론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12%는 끈질기게 전화를 해서 결국 판매를 하게 되는데 놀라운 것은 그 12%가 전체 판매량의 80%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이 12%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일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명으로 여기지 못하면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여기까진가 보다!’라며 포기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고 합니다. 
 
“나는 독일전란 때 자유를 애호하는 자였다. 
나는 이것을 보수하기 위하여 대학교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독재자의 탄압 아래서 모든 대학교들도 침묵을 하였다.  
 
나는 다시 신문 편집자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도 침묵을 하였다. 
나는 독일의 자유를 위하여 글을 쓰던 유명한 저술가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도 벙어리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만은 히틀러의 탄압 아래서도 진리를 위하여 굳게 서는 것을 보았다. 
나는 전에 교회에 대하여 흥미가 없었던 사람이었으나 이제 나는 교회에 대하여 
애정과 탄복을 느끼는 바이다.” 
 
끝까지 가려면 그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임을 믿어야합니다. 
관계에서도 “네가 그렇게 나오면 우리 관계는 여기까지야.”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런 관계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관계의 주체가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맺어주신 관계라는 믿음이 있어야 끝까지 갑니다. 
부부관계도 “내가 왜 저 사람이랑 결혼했지?”가 아니라 “주님께서 맺어주셨으니 이런 고난도 은총일 거야!”라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소명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계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화려한 모임에 초라한 모습의 마더 데레사 수녀가 끼여 있었습니다.  
 
한 정치인이 인도 켈커타 빈민가에서 행하는 데레사 수녀의 활동에 대해 언급한 뒤 수녀님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하는 일이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별다른 성공을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가끔 좌절하거나 실망한 적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어떻습니까?” 
 
이에 데레사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천만에요, 전 실망하거나 좌절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제게 성공의 임무를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의 임무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것 다 아니라도 끝까지 간직해야 하는 소명은 ‘기쁘게 내어주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소명입니다. 
 
어떻게 기쁘게 내어주라는 것인지는 “다 이루었다!”라고 하며 기쁘게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는 예수님을 보면 됩니다. 
이 사랑의 소명을 사는 것이 오늘 죽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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