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다니엘 7,9-10.13-14
루카 9,28ㄴ-36
< ‘관계’가 남는 만남 >
공동생활을 오래했던 한 수사 신부님이 이탈리아의 한 공동체를 방문했습니다.
4백 명이 함께 공동 생활하는 곳인데 서로를 대하는 이들의 모습은 매일, 아침이나 저녁이나 따뜻하고 변함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공동생활의 어려움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답니다.
“어떻게 이런 신선한 사랑을 매일 나눌 수 있습니까? 서로 지겹지 않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희들은 매일 아침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오늘 내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내가 처음 만나는 사람인 것처럼 대하게 하소서.’”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즐거울까요, 긴장이 될까요? 당연히 긴장이 됩니다.
그리고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많은 준비와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이미 나의 사람이 되었다고 편하게 생각하면 막 대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혹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함으로써 상대에게 부담을 줍니다.
그렇게 관계가 소원해지게 됩니다.
정채봉씨가 쓴 에세이집에 ‘만남’이란 글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작가는 여러 가지 만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가장 잘못된 만남이 생선 같은 만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만남은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으로 꽃송이 같은 만남을 듭니다.
피어있을 때에는 환호하지만 시들게 되면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지우개 같은 만남입니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만남 중에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어떤 만남일까요?
그것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입니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기 때문입니다.
만남은 이렇게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지만 크게 보자면 오래 지속되는 만남과 빨리 끝나버리는 만남, 이렇게 딱 두 종류가 있는 것입니다.
오래 지속되는 만남엔 ‘눈물’이 있습니다.
이 눈물이 마냥 기분 좋은 눈물만은 아닐 것입니다.
상대의 아픔을 감싸주기 위한 눈물이요, 나를 사랑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눈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래 가는 만남은 내가 즐겁기 위한 만남이라기보다는 상대를 즐겁게 해 주는 만남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로 누군가를 만날 때 힘이 든다면 잘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 즐겁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힘들면서도 즐겁다면 잘 만나는 것입니다.
즐겁기만 하다면 내가 그 사람을 이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이익을 얻기 위해 만난다면 그 사람과의 만남이 즐겁습니다.
그러나 상대를 위한 만남은 많은 참아냄이 필요합니다.
매번 처음 만나는 것처럼 긴장해야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사람을 만날 때 즐겁다면 그 사람을 만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을 만날 때 힘이 들면 만나도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불만 때문에 하느님께 죽여 달라고 청한 인물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에게 좋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만남이 좋은 만남입니다.
엘리야는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과 만났습니다.
심지어 삼년 반이나 그들을 피해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에게서 바알 예언자들을 죽여 이스라엘을 정화하였습니다.
이런 만남이 좋은 만남입니다.
마냥 즐겁기만 하다면 나중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 힘이 듭니다.
그래서 좋은 만남인 것입니다.
자녀가 나이든 부모와 만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만남이 남는 만남입니다.
그래서 힘이 든다면 계속 만나야합니다. 그래야 나도 발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도에도 적용됩니다.
하느님은 나에게 영광을 주시기 위해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나를 죽이기 위해 기다립니다. 나의 피를 빼내시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신 예수님도 그런 하느님을 만나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도 나를 만나시는 것이 힘이 드십니다.
당신의 피인 성령을 주셔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 피를 흘리는 만남이기 때문에 오래 가는 만남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자들은 아직 이 만남을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
영광 속에서만 머물려하고 피를 흘리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순교해야 함을 더욱 확고히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성경을 뜻합니다.
성경 말씀은 바로 ‘탈출기’에 관한 내용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오늘 복음에서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라고 하듯이 ‘나의 죽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영광만을 위한 기도가 얼마나 기도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지를 알아야합니다.
부모를 만나 자신을 크게 만들려는 사람이 있고, 부모를 만나 자신을 작게 만들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를 만나 자신을 크게 만들려는 사람은 부모를 이용하는 사람이고, 부모를 통해 자신을 작게 만들려는 사람은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관계가 진정한 관계인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하는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자신의 뜻에 따라 하느님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기도는 하느님을 공경하는 기도이고 어떤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은 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나아가시는 것을 보시며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고 하시며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의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기도한다면 주님께서는 그런 영광은 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은 나를 죽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지 키우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고 나면 반드시 내가 조금 더 주님의 뜻에 죽어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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