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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7월 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7-08 조회수 : 440

7월8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창세기 28,10-22ㄱ
마태오 9,18-26 
 
<나의 이웃에 대한 내 자비로움의 정도가 내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비례한다>. 
 
 
돈멀루의 ‘붐비는 우회로’라는 책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자기 회사의 자금 중 수천 달러를 
몰래 빼돌린 한 젊은 회사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행위는 적발되었고, 젊은이는 사장실에 가서 그 경위를 보고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질 법적 조치가 두려웠습니다. 
그의 행위가 모두 사실이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깜짝 놀랄 만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가 자네를 지금 그대로 일하게 해 준다면, 앞으로 자네를 믿을 수 있겠는가?”
젊은이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대답했습니다. 
 
“예, 사장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도 이 일로 인해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사장이 말했습니다.
“나는 자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네. 가서 일을 계속하게.”
젊은이와 대화를 끝내면서 사장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어. 
이 회사에서 유혹에 넘어갔다가 관용을 받은 사람은 자네가 두 번째 사람이야. 첫 번째 사람은 나야. 나도 자네와 같은 짓을 했었지. 
자네가 받고 있는 자비를 나도 받았다네.”
자비를 받은 사람은 자비롭습니다. 
인간이 이웃에게 자비로울 수 있는 이유는 그런 자비를 받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절대적으로 믿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자신의 딸이 죽어서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회당장과 혈루증을 앓는 여자입니다. 
이 두 사람의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이 그들의 말과 생각에서 잘 드러납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대로 행동해주십니다. 
죽은 이를 위해 곡을 하는 군중들을 보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혈루증을 앓는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내가 믿느냐와 같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딸을 다시 살려줄 분이라고 판단했고,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자신의 병을 낫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하느님의 존재나, 예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구원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마귀도 하느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신 것은 믿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하느님의 자비에 관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자비를 믿는 사람은 이웃에게 자비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에게 무자비하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도 무자비한분으로 판단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 안의 같은 판단의 기준으로 하느님도 판단하고 이웃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의 자비에 의지하지만 그의 형은 아버지가 그렇게 자비롭게 동생을 대하는 것에 대해 화를 냅니다. 
아버지는 더 엄해야 한다고 판단해놓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그렇게 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버지와 동생에게 엄한 모습을 보입니다. 
형은 아버지 옆에서 봉사하면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 안에 있는 죄가 사람을 무자비하게 만듭니다. 
제가 강의하다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이죠?” 라고 물으면 신자분들은 “예!”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저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이 숨겨놓은 과일을 먹었다고 해서 호적에서 파버리는 부모님이 계신가요?”라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신자분들은 웃으십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그 정도로 자비로운데 우리는 하느님을 왜 그렇게 엄한 분으로 판단해 놓은 것일까요? 
하느님은 선악과를 톱으로 베어서 잘라버렸어도 그들을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들이 쫓겨난 실제적인 이유는 하느님께서 부르실 때 숨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판단해놓은 것 자체가 믿음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내 앞에서 무서워 숨기만 하는 사람과 무슨 관계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죄에서 벗어나야합니다. 
죄는 행위로만 짓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판단하는 교만으로도 짓습니다. 
죄는 인간 안의 자아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반면 자아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니 죄를 짓는 이의 특징은 이웃도 심판하고 하느님도 무서운 분으로 여깁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죽여가면서까지 당신의 자비를 보이셨습니다.  
 
십자가를 보며 아드님까지 우리를 위해 죽이신 하느님의 자비가 어느 정도인지 깨달아야합니다. 
그 자비를 깨달았다면 이웃에게 무자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키우고 싶다면 이웃에게 먼저 자비로운 사람이 되면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도 자비로운 분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웃만 사랑할 수 있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믿게 되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들처럼 구원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서도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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