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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7월 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7-06 조회수 : 570

7월6일 [연중 13주간 토요일] 
 
창세기 27,1-5.15-29
마태오 9,14-17 
 
<새 포도주는 성령이시고 새 부대는 예수님이다> 
 
 
광해 8년, 왕위를 둘러싸고 권력 투쟁이 심해지고 하루하루 목숨을 위협받는 현실에 왕의 히스테리와 분노는 날로 늘어갑니다.
그리고 반대자들이 탄 독으로 인해 광해는 의식불명이 됩니다.  
 
허균은 정세가 어지러워질 것을 염려하여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질 것을 각오하고 왕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임시 왕으로 앉힙니다. 
 
임시 왕은 궁녀로 팔려온 아이의 사정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부자에게 세금을 더 내도록 하며, 쓸데없는 군사 파병을 막습니다. 
그는 껍데기는 왕이지만 속은 백성이었습니다.
백성의 입장에서 백성을 보니 백성을 섬기는 정치를 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명나라의 사신이 온다고 최고 극진한 대우를 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말에 열이 받은 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들이 말하는 사대의 예, 나에겐 사대의 예보다 내 백성들의 목숨이 백 곱절 천 곱절 더 중요하단 말이오!” 
 
신하들도, 백성들도 모두 이 가짜 왕이 진짜이기를 바라게 됩니다. 
꾸민 이야기라 하더라도 만약 이런 식으로 광해가 계속 집정을 하였다면 인조반정으로 폐위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란 것이 영화의 메시지입니다.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두려워하며 다른 이들을 적으로 여기며 백성을 바라보느냐, 백성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백성을 바라보느냐는 큰 차이입니다. 
백성의 자리에서 바라보아야 백성의 마음을 알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것입니다.  
 
참 왕은 자리만 지키려는 왕이 아니라 자신의 옷을 가장 보잘 것 없는 백성에게 넘길 수 있는 왕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 자리에 맞는 그릇일 것입니다. 
 
사제도 신자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라 여기며 신자들을 바라본다면 참으로 겸손한 사제가 될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해도 잘 되지 않는 이유는 언제나 사제 옷을 입고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보고 또 그 모습에 속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으로 자처하시고 당신의 자리를 가장 작은 우리가 앉도록 높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참 왕의 그릇일 것입니다. 
 
오늘 독서엔 야곱과 에사우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성경해석을 잘못하는 바람에 애꿎은 에사우만 나쁜 사람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에사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참 왕으로써 자신의 장자권을 우리 하찮은 예물인 빵과 포도주를 받고 넘겨주시는 분이십니다. 
 
에사우는 붉다는 뜻인데 그 이유는 당신의 가죽을 벗겨서 우리에게 넘겨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를 덮어줄 수 있는 유일한 의로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심으로써 그분의 의로움이 우리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옷을 우리에게 넘겨주어 우리가 왕이 되게 하신 분,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으로써의 그릇입니다. 
 
하늘나라의 상속은 바로 성령을 받음으로써 일어납니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악은 하느님을 대표하는 심판관으로써 눈을 감고 계십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입은 야곱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레베카는 교회로써 야곱에게 에사우라고 우기라고 하면서 에사우의 옷을 입혀줍니다.
에사우는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우리를 위해 저주받기로 예정된 분이십니다.  
 
레베카는 에사우가 우리에게 장자권을 주더라도 자신의 장자권을 영원히 잃지 않을 것임을 압니다. 
에사우만이 껍질이 벗겨지더라도 하느님께 사랑받을 유일한 아드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이야기의 맨 끝에 야곱이 아무리 축복을 많이 받아도 결국 에사우에게 얼굴을 들 수 없는 처지로 에사우를 만나게 됩니다.  
 
어쨌건 야곱이 에사우라고 끝까지 우겨야하는 이유는 에사우만이 이사악이 주려는 상속을 감당할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는 이 믿음만이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7)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당연히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을 헌 가죽 부대에 담으면 감당이 되지 않아 성령도 쏟아지고 가죽 부대도 못쓰게 됩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라는 믿음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성령을 받아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로 새로 태어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와의 혼인을 통해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 라고 하시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삼고 교회가 신부가 되면 그분과 한 몸이 됨으로써 우리가 당당히 예수 그리스도라고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혼인이 완성되는 시간이 성체성혈을 영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심으로써 신랑의 도리를 완성하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분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란 믿음도 없으면서 단식과 같은 계명을 지켜봐야 소용이 없음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법을 지키는 것보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가장 작은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에게 하늘나라의 왕의 자리를 주기위해 나의 옷을 벗어 넘겨주는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새 부대란 성령을 담을 합당한 그릇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성령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나의 위치로 끌어올리고 내가 가장 낮은 곳으로 가라고 나의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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