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4일 [연중 13주간 목요일]
창세기 22,1-9
마태오 9,1-8
<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 모욕하는 것이다 >
인공지능(AI) 로봇 영화인 ‘엑스 마키나’.
유능한 프로그래머 칼랩은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천재 개발자 네이든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네이든의 비밀연구소로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네이든이 만든 인공지능 ‘에이바’를 만나게 됩니다.
칼랩은 에이바의 감정이 진짜인지 아니면 프로그래밍 된 것인지를 밝히는 테스트에 참여하게 됩니다.
매혹적인 모습의 에이바에게 칼랩은 한눈에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에이바도 칼랩에게 애정을 주며 자신을 만든 네이든을 믿지 말라고 말합니다.
칼랩은 네이든의 이상한 행동을 보며 점점 에이바의 말을 믿어갑니다.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의 감정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입니다.
칼랩은 에이바를 만든 인간 네이든보다, 기계인 에이바를 더 믿어갑니다.
결국엔 인간이 AI에게 이성과 감정까지도 조정 당하게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무엇을 믿어야하는지도 말입니다.
칼랩은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혼돈 속에서 자기 자신이 인공지능은 아닐까하는 의심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그리고는 에이바를 탈출시키기 위해 네이든을 배신합니다.
에이바는 네이든을 죽이고 자신에게 이용당한 칼랩도 배신한 채 탈출에 성공하여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완전한 AI 기술의 발전은 인류의 종말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라고 했고, 테슬라 모터스 일론 머스크 또한 “어쩌면 우리는 AI라는 악마를 불러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라고 우려를 표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던져준 것은 평화로웠던 인간을 도탄과 전쟁으로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요즘 프로 9단의 바둑기사는 인간에게서 바둑을 배우지 않고 AI에게 바둑을 배운다고 합니다.
훗날 AI를 통제하지 못하는 때가 오면 AI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일이 이미 우리 자신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안의 AI는 ‘이성’입니다.
이성은 나의 도구인데 이것이 나의 주인이 되는 날 나의 파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성적 사고가 바로 나 자신이라 생각하며 그것에 지배받기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성은 도구이지 주인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이성이 한 일이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지배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심판하여 그분이 부르실 때 숨도록 했습니다.
고작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다고 믿게 했습니다.
이성에 속으니 하느님과 단절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안에 통제하지 못하면 통제받게 되는 AI가 이성인 것입니다.
이 이성에게 지배받는 대표적인 사람들의 부류가 바리사이-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믿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인간에게 줄 수 없다고 여깁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며 당신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하시는 것을 보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사람들에게 주신 하느님을 찬미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성에 중독된 이들은 이것마저 속임수가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으로 보고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입니다.
표징을 보고 이성적으로 추론해서 더 큰 믿음으로 나아가야합니다.
이것이 표징을 보여주시는 이유입니다.
교회에서 지금도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사제들이 행사하고 있다면 이는 주님께서 그 권한을 주셨다고 보아야합니다.
누가 감히 죄를 용서하겠다고 나설 수 있겠습니까?
혹은 성체성혈의 예식을 행하는 것만 보아도 믿어야합니다.
누가 감히 밀떡과 포도주를 가져다놓고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벌어지는 있는 모든 것들이 믿을 수 있는 표징들임에도 직접 예수님이 나타나서 용서해주셔야 하고, 직접 예수님이 미사를 집전해주셔야 한다고 하면 그것이 악한 생각인 것입니다.
이는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믿기 싫어서 안 믿는 것입니다.
이성은 믿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기 위해 이용해야 하는 도구입니다.
도구가 주인이 되면 그 사람은 이성의 노예가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 이성을 도구로 사용해야하는데 이성을 섬기면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싸워야하는 것은 이성입니다.
이성을 주인이 아닌 도구로 만들어야합니다. 이성은 하느님께로 가기 위한 도구입니다.
도구를 믿으면 그것이 곧 그 사람에겐 재앙입니다.
영화에서 인공지능 로봇이 처음엔 인류에게 봉사하는 듯하다가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성을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지 않으면 그것이 나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이성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누가 방을 청소하는 로봇이나 스마트폰을 자신의 주인으로 믿어 복종하려합니까?
그것들은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에 너무 몰입하면 오히려 그것들에 지배를 받습니다.
빠져나오지 못해서 해야 할 일도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성도 내가 도구로 사용해야지 그것에 너무 빠져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성은 하느님을 아는 데 사용되면 그만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성을 통해 오히려 하느님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이성 중독에서 빠져나와야합니다.
그 방법은 하느님의 빛으로 이성을 도구로 이용하여 하는 묵상을 하는 것입니다.
혹은 이성과의 대화를 끊고 하느님만을 바라보는 관상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국 이성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인류가 AI에게 지배를 받게 되는 서막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도구를 단지 도구로 잘 다스릴 수 있어야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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