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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7월 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7-03 조회수 : 410

7월 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에페소 2,19-22
요한 20,24-29 
 
< 믿기 위해 ‘독창성’을 찾아라! > 

‘오리지널스’의 저자 애덤 그랜트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영사상가 25인’에 들만큼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것은 내가 내린 결정 가운데 최악의 결정이었다.”라고 후회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2009년 한 명이 찾아와 사업 구상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회사에 투자해달라고 한 제안을 거절한 것이었습니다. 
 
인터넷으로 안경을 팔겠다는 그 구상은 누가 보더라도 가망이 없어 보이는 사업이었습니다.
안경은 대부분 직접 찾아가 시력도 측정해보고 자신의 얼굴에 어울리는지 써보고 구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네 명이 설립한 인터넷 안경 판매 회사인 와비파커는 2015년 ‘패스트컴퍼니’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 1위’를 차지하였습니다.  
 
과거에 이 목록에서 1위를 차지한 기업은 구글, 나이키, 애플 등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회사의 성공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올 수 있을 것입니다. 
조금만 투자했어도 재벌이 될 기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왜 경영 심리학 분야의 세계 최고의 권위자라는 자신이 그렇게 성공할 회사에 투자를 거절하였는지 애덤 그랜트는 꼭 알아내고 싶었습니다. 
그 연구 끝에 써 낸 책이 ‘오리지널’인 것입니다.  
 
오리지널은 ‘독창성’을 말합니다. 
독창성이 믿음을 줍니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안경을 파는 것은 그렇게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놓친 게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시중에서 500달러짜리를 95달러에 팔았고 안경 하나가 팔릴 때마다 개발도상 지역에 안경 하나를 기부하는 방식을 썼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편하고 싼 값에 안경을 사면서 가난한 나라를 돕는 기쁨도 함께 누릴 수 있었습니다. 
애덤 그랜트는 이 독창성을 놓쳤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하신 몸을 보아야만 믿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말씀은 당신을 보지 않고도 충분히 믿을 수 있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 당신의 부활을 본 여자들과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 그리고 나머지 사도들의 증언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충분한 근거들이 있었는데 너는 왜 믿지 못하였느냐는 가벼운 꾸중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복음에서 라자로를 부활하게 하여 자신의 형제들을 믿게 해 달라는 부자의 청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죽은 이의 부활에 대한 표징보다도 더 큰 표징이 성경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보고도 믿지 못한다면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난 것을 보아도 믿지 않을 것이란 뜻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것보다 훨씬 많은 표징들이 있으니 예수님을 보지 못해서 믿지 못했다고 하는 핑계는 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어떤 독창적인 면을 찾아내서 믿을 수 있을까요? 
불교의 경전도 있고 이슬람의 코란도 있는데 왜 성경만이 그 믿을 수 있는 독창성을 지닐 수 있을까요? 
 
저 같은 경우는 ‘십자가’가 가장 큰 표징이었습니다. 
어떤 신이 인간이 되어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죽을 수 있을까요? 
만약 신이 칼을 쥐고 있거나 큰 의자에 위엄 있게 앉아 있었다면 저는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이 충분히 생각해 낼 수 있는 정도의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혀 믿고 투자할만한 독창성이 없는 것입니다. 
 
비싼 명품을 두르고 멋진 차에서 내리는 장면이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에 어울리는 모습일까요?
나를 낳아주셨다면 나를 책임지시기 위해 고생하셔야 당연할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휘어지고 거칠어진 손과 발 때문에 어머니가 저의 어머니인 것을 믿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생명을 내어주시는 모습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도 십자가의 표징보다 더 큰 믿음을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을 것이라고는 어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믿습니다. 
누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죄인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목숨을 걸고 선포할 수 있었을까요?
제자들이 본 십자가의 예수님이 하느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선물도 하고 기념일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작은 것들에서 사랑이 드러나기에 전화를 안 받거나 조금만 퉁명하게 말해도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런 것으로 계속 사랑을 증명해야 할까요? 
그냥 하느님께서 맺어주셨다는 확신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 그런 것들로 계속 사랑을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둘의 사랑이 오래가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둘을 맺어주셨다는 ‘독특한 무언가’를 찾아내야합니다. 
그것을 통해 믿기만 한다면 조금 더 관계가 편안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꼭 보고 믿으려고 하지 맙시다. 
분명 믿어야 할 것 안에는 충분한 믿을 근거가 들어있습니다. 
믿으려고만 한다면 반드시 그것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그래서 더 행복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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