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0일 [연중 13주일]
열왕기 상권 19,16ㄴ.19-21
갈라티아 5,1.13-18
루카 9,51-62
< 나에게서 벗어날 때,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
한 노파가 실, 단추, 구두끈을 팔려고 시골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노파는 길 표시가 없는 갈림길에 서게 되면 공중으로 막대기를 던져서 그 막대기가 가리키는 길로 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노파는 갈림길에 서서 어떤 길로 가야할 지를 알기 위해
막대기를 공중에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만 던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파는 막대기를 계속 반복해서 던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이 광경을 보고 그 노파에게 물었습니다.
“왜 당신은 그렇게 막대기를 여러 번 던집니까?”
그러자 그 노파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막대기가 지금까지 계속 오른쪽으로 가는 길만 가리키잖아요.
그렇지만 나는 왼쪽으로 가고 싶거든요. 그 길이 순탄해 보이니까요.”
그 노파는 그녀가 가고 싶어 하는 길을 막대기가 가리킬 때까지 계속해서 던졌습니다.
실제로 주어지는 뜻대로 따르겠다고 말하면서도 따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뜻을 따르려면 내 뜻은 버려야합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발생합니다.
나를 버리지 못하면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다가 결국 자기 뜻에 안 맞으면 주님을 따르기를 포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결심하십니다.
본문에 “마음을 굳히셨다.”라고 하는 이유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 함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도 모르고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과 일행을 맞아들이지 않고 내쫓았습니다.
그 이유는 유다인들에게 박해받는 예수님이 자신들의 편인 줄 알았는데 축제를 지내겠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니, ‘결국 그들 편이었군!’이라며 실망했던 것입니다.
같은 나라라고는 하지만 사실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원수지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 머물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신들 뜻 안에 머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에 화가 난 제자들이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 혼만 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그렇게 한다면 살아남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그 동네에 애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 적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벌레처럼 취급하던 그들을 예수님은 사랑으로 감싸주셨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야기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세 명의 이야기로 전환됩니다.
분명 이는 사마리아 인들이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사람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이는 “네가 만약 나를 통해 세상의 영광이나 재물을 원한다면, 저 사마리아인들처럼 결국 십자가의 삶까지는 나를 따르지 못하게 될 거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이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라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세상과 가족에 애착을 하지고 있다면 어떻게 나의 복음을 전하겠느냐?
나를 따르려거든 세상 모든 애착을 버려야한다. 사마리아인들도 세상 것들에 휘말려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하시자,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또한 “나를 따르겠다고 한다면 한눈팔지 마라. 이랬다저랬다 하다가는 결국 저 사마리아인들처럼 나를 모른다고 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을 따른다는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갑자기 세상에서 자랑이었던 아들이 죽게 되거나, 잘 되던 사업이 망하여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다거나, 믿고있던 신자에게 배신을 당하는 등의 일이 생기면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한 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먼저 세상 것에 집착하는 나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합니다.
나에게서 빠져나오면 세상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집니다.
내 안에 세상의 눈치를 보는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다와 같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바다 속에서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바다를 밟고 예수님의 눈으로 바다를 내려다보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바다 속에 있다면 ‘세상은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혹은‘예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해 주나 안 해주나?’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물 위를 걷게 된다면 세상과 예수님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게 되어 아무 눈치도 보지 않게 됩니다.
다만 예수님의 뜻대로 내가 살고 있는지 아닌지만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IQ 210의 천재”, “4세부터 대학 수업 청강”, “8세에 미국대학원 최연소 입학”,
“10세에 미국항공우주국(NASA) 입사”
김웅용 씨는 어린나이에 NASA라는 직장에서 아침부터 밤 11시까지 온종일 수학문제만 풀었습니다.
“10세 소년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년씩 계속 계산만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내가 대체 누굴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거지? 왜 이런 일만 해야 하는 거지? 회의가 들 수밖에 없죠.”
일에 대한 회의가 커지면서 직장상사들과의 갈등도 깊어져 마침내 16세가 되는 해
NASA를 떠나 한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한국에서 다시 2년간 검정고시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과정을 모두 마치고 대학입학을 하려고 할 때 기자들 때문에 체력장을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신문에 이렇게 실렸습니다.
“미국 대학원을 마친 IQ 210의 천재가 대학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실패한 천재.” 등등그는 서울을 떠나 지방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거죠.
3학년 때까지 신나게 놀기만 했어요. 동아리도 일곱 개나 들고.”
그는 난생 처음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김웅용 씨는 한 때 천재라는 이름을 붙여준 세상을 바라보며 살 때가 있었고, 이제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살고 있습니다.
자유롭지 못하면 천재도 아무 역할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먼저 배워야하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입니다.
나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세상에 휘둘리게 됩니다.
내 안에서 세상 눈치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 안에서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세상이 자신에게 하는 것이 불만족스러웠고 그래서 불이라도 내려
보복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입장에서 당신을 바라보니 다 이해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입장을 넘어서서 하늘에 계신 하느님 입장에서 세상과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러니 당신이 작아 보이고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도 작아 보입니다.
그렇게 초연할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세상의 애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야합니다.
이것이 물 위를 걷도록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빠져나오는 시간을 ‘기도’라 합니다.
기도는 영혼을 하늘로 들어 높이는 시간입니다.
그러면 몸은 세상에 남아있지만 나의 시선은 하늘에 있게 됩니다.
그런 상태로 살아간다면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고 벌써부터 하늘나라에서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당당히 십자가의 두려움과 맞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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