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5일 [부활 제3주일]
제1독서 : 사도행전 5,27ㄴ-32.40ㄴ-41
제2독서 : 요한 묵시록 5,11-14
복음 : 요한 21,1-19
< 부모로부터 벗어나는 법 >
에리히 젤리히만 프롬(1900~1980)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태인 독일계 미국인 사회심리학자이면서 정신분석학자,
인문주의 철학자입니다.
그는 정신분석하자로서는 선구자적으로 ‘사랑하는 법’에 대해 집중했습니다.
그만큼 사랑을 많이 실패해 보았기 때문에 사랑을 정신분석학과 연결시켰습니다.
그는 프로이트 사상을 공부했지만 모든 것을 성적인 충동으로 해석하려는 그와는 다르게
사랑은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배우고 노력하면 습득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가장 먼저 부모를 극복하는 과정을 겪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이 생각은 그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지나치게 통제하려는 어머니와 약하고 죄책감이 많은 아버지 밑에서 컸습니다.
어머니는 가족을 통제하려는 데서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려했고, 아버지는 자녀의 종교교육을 통해 자신의 죄책감을 극복하려 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그는 여러 번의 사랑과 결혼의 실패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아버지는 유태인이었음에도 와인 장사를 하였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는 율법을 아버지가 스스로 어기면서도 술장사를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자녀를 많이 낳으라는 성경말씀과는 다르게 한 자녀만을 두었습니다.
그 죄책감으로 유일한 자녀인 에리히 프롬에게는 더욱 더 종교교육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에리히 프롬은 탈무드 학자가 될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공부하고 나서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묶여있음을 깨닫고
유다교에서 절대 금기시된 ‘돼지고기’를 먹는 예식을 통해 아버지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창의력이 솟아나기 시작했던 때는 바로 매우 엄격한 삶을 강조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였습니다.
어쩌면 부모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자녀에게서 자신의 영향력을
제거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에리히 프롬이 아버지로부터 떠나는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모든 아이가 그렇지만 그도 어려서부터 어쩔 수 없이 어머니의 애정에 집착하고 어머니의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삶 자체가 어머니를 만족시키려는 욕구에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자랑이 유일하게 그 아들 하나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타인의 애정을 타인의 욕구와 함께 받아들이기 때문에 애정을 받으면 반드시 타인의 욕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에 아무리 그 욕구를 채워주려 해도
상대를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려고 해도 그 사랑은 부모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한풀이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부모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또 다른 엄마와 아빠를 찾는 과정이 결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연상의 여인들과 사귀고 결혼하고 또 실패하면서 결국 자신이 여인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여인들을 이용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참조: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문예출판사]
예수님은 사랑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마태 19,5)라고 하는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그러니까 세상 창조 때부터 누군가를 순수하게 사랑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하도록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부모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을 만나기 이전에 가졌던 모든 꿈은 부모나 세상으로부터 받은 애정에 함께 들어온 것들입니다.
그 꿈들은 부모나 세상이 자신도 모르게 우리를 자신들의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이용하기 위해 넣어준 것들입니다.
그러니 먼저 이전에 가졌던 꿈을 접어야합니다.
부모의 사랑과 함께 주입된 그 꿈이 나를 가두어놓기 때문입니다.
그 꿈을 그대로 유지하면 그 사람이 만나는 사람들은 그 꿈을 이루는 도구가 됩니다.
사랑하지 못하고 이용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해도 하느님까지도 그 꿈을 위해 이용하게 됩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들릴 수가 없습니다.
정신없이 달리면 보지도 듣지도 못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물고기를 잡아 풍족한 삶을 사는 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꿈은 부모를 포함한 세상으로부터 주입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는 그 꿈을 접었습니다.
오늘도 할 일이 없어 고기를 잡으러나갑니다.
그리고 몇몇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갑니다.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없어진 것입니다. 꿈을 접은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니 밤새 고기를 잡았는데도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크게 실망하지 않습니다.
호숫가에서 어떤 낯선 이가 오른 편에 그물을 한 번 더 던져보라고 하니 그 말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아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부활하신 예수님임을 알아봅니다.
그분임이 너무도 확실하여 누구시냐고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신의 꿈을 접고 하느님의 꿈을 입으면 좋은 결과를 내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인간이 주는 꿈은 그 목적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에 삶이 지칩니다.
그래서 그 불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해 현세의 쾌락에 쉽게 넘어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꿈은 목적지를 향해 질주하는 고통이 없기 때문에 현재를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니 구약의 요셉처럼 현세의 모든 유혹도 쉽게 이기게 만들어줍니다.
그 이전에 이길 수 없는 나를 이기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 기적을 체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과까지 기적적으로 좋으니 주님의 현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목적지를 향해 정신없이 달리기를 하는 것을 그만두고
잠시 멈추어 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고등학교, 심지어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성당에 나오지 않으려합니다.
그 이유는 어쩌면 부모님이 심어준 그 아이들의 꿈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꿈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애정을 통해 넣어준 것입니다.
대부분 아이들의 꿈은 부모를 만족시키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바쁜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성당에 나오려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부모나 세상의 책임입니다.
그 꿈에서 벗어나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이 있다고 가르쳐야합니다.
나에 대한 하느님의 꿈을 찾으라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어느 정도는 자신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몰라 불안해 할 수도 있지만 종국에 가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마치 요셉처럼 참 꿈을 찾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는 방법입니다.
부모는 자신이 부모가 아님을 말해주고 참 부모는 하느님과 성모 마리아라고 알려 주어야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하느님도, 이웃도 사랑할 능력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잡은 물고기는 그들이 참으로 사랑하여 새롭게 탄생시킨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그 자녀들을 창조하는 새로운 창조자가 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꿈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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