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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1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4-15 조회수 : 417

4월 15일 [성주간 월요일] 
 
복음: 요한 12.1-11 
 
< 봉헌을 아까워하면 은총도 아까워하신다. > 

‘알파: 위대한 여정’(2018)은 수만 년 전 개가 탄생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려 한 영화입니다.
케다라는 이름의 한 부족의 추장 아들이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잃으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추장은 아들을 매우 사랑했지만 사냥하는 가운데 그만 그를 잃고 맙니다. 
죽은 줄 알고 아버지와 동료들은 다시 집으로 복귀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살아있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신념과 부모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기 위해 험난한 길을 헤치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 과정에서 늑대에게 쫓기면서 한 늑대를 칼로 찔러 상처를 줍니다. 
늑대는 동료들에게 그렇게 버려졌습니다.  
 
케다는 자신이 찌른 늑대가 자신과 같은 처지로 여겨져 그 늑대를 돌보아주고 서로 의지합니다.  
 
그러면서 늑대는 인간에게 길들여지고 또 인간도 늑대를 의지합니다. 
집이 있는 마을로 도착했을 때 늑대는 새끼들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길들여진 늑대들과 인간이 함께 사냥을 시작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근거가 있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늑대가 개가 되려면 몇 세대에 걸쳐 길들여지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도 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늑대가 길들여졌고 그렇게 길들여진 늑대를 통해 인간은 그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사냥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케다는 자신이 길들인 늑대에게 ‘알파’란 이름을 지어줍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새로 태어나게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새로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 흘림이 전제됩니다. 
피 흘림 없이 태어나는 생명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동물에게 새 이름을 지어주던 일은 세상 창조 ‘육’일 째 있었던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파스카 축제 ‘엿새’ 전이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삼(3)’은 죽음과 부활, 혹은 세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태어남이 두 번 반복되면 ‘육(6)’이 됩니다. 
그래서 ‘육(6)’은 누군가 ‘새로’ 태어나는 날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곳은 무덤이 아니라 ‘동산’으로 불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동산지기로 등장하십니다.
그리고 일곱 마귀 들려 고생하던 마리아에게 새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이 장면에서만 ‘마리아’란 이름이 등장합니다. 
요한은 한 여인에게서 일곱 마귀를 당신 피로 쫓아내시고 세례를 통한 새 이름을 주시고 계신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상하며 이 복음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마리아 막달레나와 이 베타니아의 마리아, 그리고 부활하셔서 처음으로 만나신 마리아가 동일인물이라는 명확한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정황상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마리아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기 위해 그분의 발에 미리 준비한 향유를 붓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에 대한 감사의 행위입니다.  
 
발을 머리로 닦는다는 말은 그 분을 주인으로 삼겠다는 말입니다. 
마치 길들여지는 짐승이 인간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길들여짐은 분명 이렇게 상대가 자신에게 해 주는 사랑에 대한 감사에서 시작됩니다. 
 
성지주일에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들어오시는 것처럼, 예수님은 당신 죽음으로 마리아 안으로 들어오셔 일곱 가지의 죄로 표현되는 욕구를 없애버리십니다. 
당신이 주인이 되셔서 동물처럼 지내던 한 여인을 당신의 하와로 삼으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를 위해 자신의 나르드 향유 병을 깬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아까워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가리옷 유다입니다.  
 
유다는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하며 향유를 아까워합니다. 
이백 데나리온이면 장정만도 오천 명이 되는 인원을 먹일 수 있는 빵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마리아가 주님의 죽음을 예비하기 위해 깨뜨린 향유는 약 삼천만 원쯤 됩니다. 
그러니 돈을 좋아하는 유다가 아까워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예수님께 그렇게 비싼 것이 바쳐지는 것을 질투한 것입니다. 
 
베타니아의 마리아와 가리옷 유다의 차이점은 주님께 무언가 바치는 것에 대해 한 명은 아까워하고, 한 명은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받은 만큼 바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길들여졌고 새로 태어났지만 유다는 길들여지지 못하고 영원한 야생으로 돌아갔습니다. 
 
주님께 무언가를 바칠 때 아깝다는 말은 그분에게서 어떤 은총이 오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총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만 효과를 발휘합니다.  
 
약처럼 먹기만 하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 바치는 것이 아무 것도 아깝지 않을 때 그만큼 많은 은총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밭에 묻힌 보물입니다. 
생명을 바치시는 그분께 우리는 무엇을 깨뜨려 바칠 수 있는지, 혹은 유다처럼 아까워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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