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1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복음: 요한 8,51-59
< 기도란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로 부활하는 시간 >
어느 마을의 농부들이 하느님께 요구하였습니다.
“하느님, 우리들이 원하는 대로 일 년만 날씨를 변화시켜 주세요.” 하느님이 대답하셨습니다.
“그래, 좋다. 일 년 동안 너희 원하는 대로 날씨를 변화시켜 주마.” 그래서 농부들은 자기들의 경험에 의해서 하느님께 요구했습니다.
“하느님, 지금은 비를 주세요.”
“하느님, 지금은 햇빛을 주세요.”
“하느님, 지금은 바람을 주세요.”
가을이 되어 들판에 곡식이 잘되어 추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농부들은 신이 나서 추수를 하고 탈곡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막상 탈곡기에 넣어 탈곡을 해보니 알곡이 없습니다.
“아니, 하느님, 왜 알곡이 하나도 없습니까?”
농부들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다 주었다. 비를 원할 때는 비를, 햇빛을 원할 때는 햇빛을, 바람을 원할 때는 바람을 주었다.
다만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기 때문에 알곡이 생기지 않은 것이다.
알곡이 들기 위한 적절한 때는 나만이 알고 있다.”
사람이 하느님을 믿지 못할 때는 자신의 맘대로 하느님을 조정하려고 합니다.
이때 “나는 이게 필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나’를 강조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은 나를 따라주는 종이 됩니다.
누구나 ‘나’가 만드는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세상은 처음엔 내가 만든 세상입니다. 나를 믿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나”라고 하시는 분이 등장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때 우리는 둘 중의 어떤 나를 신뢰할지 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4)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내가 나임을”은 “내가 ‘있는 나’임을”으로 고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알려주신 당신 이름인 “있는 나(I AM)”를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여러 차례 이렇게 하느님 이름을 사용하시지만 우리나라 번역으로는 잘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복음에서도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도 역시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는 나(I AM)’다.”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실 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실 때도, 올리브 동산에서 당신을 잡으러 오셨을 때도 “나다(I AM)”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자 병사들이 뒤로 다 넘어졌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니시면 누가 물 위를 걸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하느님인 나와 뱀인 나 사이에 누구에게 신뢰를 둘 것인지 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모든 인간은 죄 중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라는 말을 쓸 때 그 나가 신앙을 갖기 이전에 썼던 ‘나’의 의미라면 아직은 죄 중에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나’가 되시기 위해 다가오신 것입니다.
이에 요한 23세 교황은 ‘나’라는 주어를 쓰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오직 ‘나’라고 하실 분은 하느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일인칭 주어의 대상을 바꾸는 길밖에 없습니다.
나의 나를 믿지 않고 그리스도의 나를 믿어야합니다.
이것이 내가 사는 세상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꾸는 길입니다.
유독 실수를 많이 하며 얼굴이 너무 안 되어 보이는 한 목수가 있었습니다.
일을 마친 후 불쌍하게 여긴 고객(집주인)이 자기 차로 집까지 데려다 주었더니, 그 목수는 집에서 차를 대접하겠다고 했습니다.
목수는 정원을 통과하는데 어느 나무 앞에서 멈추어 이상한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나무 가지에 옷을 걸듯 같은 행동을 여러 번을 반복하더니, 환한 모습으로 얼굴이 바뀌고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180도 바뀐 모습으로 가족과 포옹하며 즐겁게 차를 마셨습니다.
차를 마시고 나오며 고객은 그 이상한 행동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수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의 가족은 내가 경험한 힘든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들입니다.
그들을 만나기 전 나의 근심을 나무에 걸어 맡깁니다.
그리고 가족을 맞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아침이 되어 다시 그 나무에 가보면 그 근심들은 어느새 없어지거나 아주 작아져 있습니다.”
나의 근심을 맡기는 나무가 바로 ‘나’입니다.
자아에게 맡기면 자아는 집안까지 따라 들어와 자신이 해결해주겠다고 난리입니다.
그래서 걱정이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님이란 나에 맡기면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집니다.
걱정하는 나, 계획하는 나, 두려워하는 나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끊임없이 나 자신을 예수님이라는 “나”에 거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 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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