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7일 [사순 제5주일]
이사야 43,16-21
필리피 3,8-14
복음: 요한 8,1-11
< 남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나는 얼마나 더럽혀질 수 있는가? >
파락호(破落戶)란 단어는 양반집 자손으로써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 파락호 중에 일제 식민지 때 안동에서 당대의 파락호로 이름을 날리던 의성金씨 가문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선생 종가의 13대 종손인 김용환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노름을 지나치게 즐겼습니다.
당시 안동 일대의 노름판에는 꼭 끼었고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걸고 마지막 배팅을 하는 주특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배팅이 적중하여 돈을 따면 좋고, 그렇지 않고 배팅이 실패하면 새벽 “몽둥이야!”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이 소리가 나오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 그의 수하 20여명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덮쳤습니다.
판돈을 자루에 담고 건달들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던 노름꾼 김용환.
그렇게 노름하다가 종갓집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 수 백 년 동안의 종가 재산으로 내려오던 전답 18만평, 현재 시가로 약 200억 원도 다 팔아 먹었습니다.
그렇게 팔아먹은 전답을 문중의 자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걷어 다시 종가에 되사주곤 했습니다.
“집안 망해먹을 종손이 나왔다.”고 혀를 차면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종가는 문중의 구심점 이므로 없어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시집간 무남동녀 외동딸이 신행 때 친정집에 가서 장롱을 사오라고 시댁에서 받은 돈이 있었는데 이 돈마저도 친정아버지인 김용환은 노름으로 탕진했습니다.
딸은 빈손으로 시댁에 갈수 없어서 친정 큰 어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가지고 가면서 울며 시댁으로 갔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 정도니 주위에선 얼마나 김용환을 욕했겠습니까?
김용환은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 세상을 떠납니다.
이러한 파락호 노름꾼 김용환이 사실은 만주에 독립자금을 댄 독립투사였음이 사후에 밝혀졌습니다.
그간 탕진했다고 알려진 돈은 모두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으로 보냈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철저하게 노름꾼으로 위장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야 일제의 눈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용환은 독립군의 군자금을 만들기 위하여 노름꾼, 주색잡기,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살면서도 자기 가족에게 까지도 철저하게 함구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임종 무렵에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독립군 동지가 머리맡에서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나?”고 하자 “선비로서 당연히 할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 할 필요 없다.”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지금의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이 김용환의 일대기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김용환의 무남동녀 외딸로서 시댁에서 장롱 사라고 받은 돈도 아버지가 노름으로 탕진하여 큰어머니의 헌 농을 싸가지고 간 김후옹여사는 1995년 아버지 김용환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훈장을 받는 그 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우리 아베 참봉 나으리”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출처: ‘예화1302, 누명쓴 애국자들’, 작성자 cyjung0103)
남을 돕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가난해지며 남을 돕는다면 이는 더 높은 경지라 할 수 있겠습니다.
불교에 지장보살이라고 있습니다.
자신이 직접 지옥에 가서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보살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덮어쓰면서까지 타인을 구제하려는 경지가 아마도 사랑의 최종점일 것입니다.
이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옥에 가도 자신은 보살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저는 최대한 남의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꼭 타인에 대한 안 좋은 말을 하면 그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러면 제가 먼저 서먹한 마음으로 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상대는 이미 제가 그 사람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한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누구와도 편하게 대하기 위해 뒤에서 남의 말을 최대한 자제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부작용이 큽니다.
다른 사람들이 함께 동조해서 그 사람의 험담을 하는데 혼자만 가만있으면 왠지 그 험담하는 사람 편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동조해 주어야합니다.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그 무리에서 환영받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더라도 끝까지 버티면 그 무리 전체가 정화될 확률도 있습니다.
군대 첫 휴가를 나온 아는 형님이 그랬다고 합니다.
친구들은 다 그 형님에게 술을 먹이고 안 좋은 곳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러기는 싫었는지 친구들에게 완강히 저항했다고 합니다.
옷도 찢기고 허리띠도 끊어졌고 안경은 나뒹굴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 곳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친구들도 결국엔 포기하고 다 함께 술을 한 잔 더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세상은 남을 심판하기 좋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이 세상에서 외톨이 되는 십자가를 감수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분이셨습니다.
간음하는 여인을 나무라지 않기 위해 세상과 적이 되셨습니다.
당신 손에 흙을 묻히셨습니다.
세상에서 그 여인 대신 당신이 더러운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그 여인에게 던지려던 돌을 놓고 돌아갔지만 결국 그 방향을 예수님께 틀었습니다.
그러나 그로인해 그 여인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되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타인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실 수 있으셨던 이유는 그래도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지위가 변하지 않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믿지 못하면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까봐 타인의 잘못까지 뒤집어 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남을 심판해서 누군가를 정화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깨끗하게 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피 흘림입니다.
누군가를 닦아주면 그 닦아준 것은 더러워지게 됩니다.
이를 감수하지 못하면 누군가를 깨끗하게 해 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자신은 깨끗한 사람이어야지 자신이 더 더러운 사람이라면 깨끗하게 해 준다고 하면서 더 더럽히게 됩니다.
죄를 짓지 않으면서도 남의 죄를 묻지 않는 사람이 세상을 정화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겐 세상의 때가 묻습니다.
그러나 마치 보석에 묻은 흙처럼 그 때는 닦으면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이렇게 우리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흘리셔야 했던 예수님의 피 흘림을 위한 도구였습니다.
자녀를 씻어주지 않는 어머니가 없듯, 이웃을 씻어주지 않는 하느님의 자녀도 없습니다.
판단할 것이 많아도, 내가 더러워져도 감수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자신 혼자 깨끗하자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조용하게 바닥에 글을 쓰며 자신이 더럽혀지면 됩니다.
그러면 누군가는 깨끗해지게 될 것입니다.
결국 나의 십자가는 타인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나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보석은 자신이 더렵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흙이 묻어도 보석은 보석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석이 아니고 약해서 세상 것과 섞이면 내 자신까지 더럽혀질까봐 자신을 보호하느라고 타인을 판단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동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보석임을 알 때 세상의 묻은 때를 벗겨줄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죄를 짊어져도 상관이 없으려면 얼마나 완벽해야 할까요?
그렇게 완벽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세상의 모든 죄를 씻어줄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나는 얼마만큼 더러워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닦아주려면 더러워져도 괜찮은 나여야 합니다.
더러워져도 괜찮은 나임을 알려면 내가 보석임을 믿어야합니다.
주님을 이것을 믿도록 당신 보석을 우리를 위해 희생시키셨습니다.
내가 보석임을 알 때 남의 때가 묻는 것을 견뎌낼 수 있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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