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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3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3-30 조회수 : 509

3월 30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 행위를 욕구와 최대한 일치시켜라 > 

영국의 에드워드 7세는 식사 예법에 몹시 엄격한 왕이어서 왕자들이 식사 시간을 언제나 무서워하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식사를 하던 요크 왕자는 갑자기 말을 더듬거리며 에드워드 7세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식사 중에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했지!”라고 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요크 왕자는 놀라서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식사 후 에드워드 7세는 요크 왕자를 조용히 불러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느냐?” 
“이제는 늦어버렸어요.”  
 
“늦어? 무슨 일이었는데?”
“그때 할아버지 음식에 벌레가 들어갔어요.”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행위가 옳은 일이라고 지나치게 집착하면 그 행위 때문에 스스로를 망칠 가능성이 커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두는 가치의 무게를 좀 줄일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착한 일을 했다는 생각 때문에 스스로 으쓱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득보다는 실이 큰 것입니다. 
인간에겐 교만이 가장 큰 해악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위에 이렇게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은 바리사이-율법학자적인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좋은 일을 다 하고도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라고 말해야합니다. 
예수님은 행위를 통해 교만해지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갓 세례 받은 아기는 지금 죽으면 착한 행위 없이도 구원에 이릅니다. 
그러나 착한 행위를 많이 한 바리사이는 그 행위들이 아무리 가치 있더라도 구원에서 제외됩니다. 
인간은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겁니까?”라고 물어봅니다. 
물론 맘대로 살아도 됩니다. 
아니 맘대로 살아야합니다.  
 
내가 맘대로 살아야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맘대로 살 때 죄를 짓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지금까지의 선행으로 자신의 본성을 숨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주 큰 죄가 아니라면 자기 좋을 대로 사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본성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대로 사는데도 죄를 짓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본성이 하느님과 매우 가까워져 있는 것입니다. 
 
이를 공자는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만 있다면 맘대로 살아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말만이 아니라 행위에서도 진실 될 필요가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이것을 못해서 자신들의 행위로 스스로를 속여 의인이라 착각하게 된 것입니다. 
 
본성으로 하는 행위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행위입니다. 
착한일은 그것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고민해서 하면 본성으로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아이가 우물에 떨어졌는데 그 아이를 구해주는 것이 착한 행위인지 아닌지 따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이 있다면 구해주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합니다. 
이것이 본성에 따른 행위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두 발로 걸어 다닐지 짐승처럼 네 발로 걸어 다닐지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본성으로 하는 행위는 고민이 따르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발전시키고 싶다면 행위에 집중하지 말고 지금 당장의 욕구에 집중해야합니다. 
내가 하는 선행이 내가 기뻐서 하는지 억지로 하는지를 살피면 됩니다.  
 
억지로 선행을 하고 있다면 다음부터는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억지로 선행을 해서 으쓱해지는 것보다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비천함을 보며 오늘 세리처럼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말하는 사람이 구원받습니다.  
 
아주 큰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면 행위를 최대한 욕구와 일치시키십시오. 
그런 사람이 진실한 사람입니다. 
또 그래야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야 변화가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아들의 비유를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마태 21,28-32). 
아버지가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할 때 맏이는 싫다고 말했고 둘째는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결과는 큰 아들은 회개하여 일하러 가고 작은 아들은 가지 않았습니다. 
큰아들은 욕구에 자신의 행위를 일치시키려 노력하는 사람의 상징이고 작은 아들은 행위에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들이 바리사이들보다 더 낫다고 말씀하시기 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욕구가 있다면 위선적으로 행동하려하는 것보다 죄를 지으며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이 낫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행동에 자신이 속지 않도록 우리는 욕구에 행위를 최대한 일치시키며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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