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1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6,19-31
< 죽어야만 알게 되는 나의 죄 >
어머니를 잃은 도라는 캘빈이라는 의붓아버지와 미국 황야지대 한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기타를 치고 있던 도라에게 캘빈은 소리를 지르며 폭력적인 언어로 나무랍니다.
기타 줄까지 잘라버립니다.
그리고 추수감사절이지만 물줄기를 발견할 때까지 우물 파는 일을 함께 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둘이 우물을 파던 중 우물 바닥이 밑도 안 보이게 꺼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캘빈과 도라는 긴 줄에 손전등을 묶어 내려 보냅니다.
잠시 뒤 손전등은 사라지고 고대 문자가 쓰인 종이와 함께 황금 덩어리가 묶여 올라옵니다.
캘빈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차를 몰고 시내로 나갑니다.
밑에 누군가 있는 것이 확실해지자 도라는 샌드위치와 영어사전을 바구니에 넣어 내려 보냅니다.
그러자 영어로 “이 음식을 햄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음식 값을 동봉했습니다.” 라는 편지와 황금 한 바구니가 실려 있었습니다.
도라는 냉장고에서 음식들을 꺼내어 내려 보냅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황금과 함께
“저희는 이것을 치킨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참 맛있어요. 또 없나요?” 라는 편지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때 캘빈이 돌아와 황금을 끌어올리는 도라에게 소리치며 욕심 많다고 나무랍니다.
그는 손전등을 수십 개 사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손전등을 하나 내려 보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손전등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먹을 것이 필요합니다.
음식 값은 없습니다.”라는 편지만 올라옵니다.
캐빈은 노발대발 하며 도라에게 10분 뒤에 끌어올리라며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밑으로 내려갑니다.
10분 뒤 황금이 가득 들어 있는 캐빈의 군복만 올라옵니다.
그리고 이런 편지가 꽂혀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칠면조라 부르겠습니다.”
이것은 1990년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어메이징 스토리’의 일부입니다.
캘빈은 타인이 자신의 이익을 채워줄 사람으로만 보았고 도라는 자신이 도와줘야 할 사람들로 보았습니다.
이 둘의 캐릭터가 오늘 복음에서 부자와 라자로의 캐릭터와 매우 닮았습니다.
부자는 누군가를 도와줄 때 항상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하지만 라자로는 그러지 않으면 안 되기에 그렇게 하는 것뿐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오늘 부자가 자신의 가족들을 지옥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는 장면을 해석해야합니다.
부자는 지옥에서도 착한 마음을 발휘합니다.
자신의 가족들이 지옥에 오지 않도록 라자로를 부활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라자로가 부활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믿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도 소용없다는 말씀입니다.
성경말씀 안엔 믿을 수 있는 충분한 근거와 힘이 들어있기에 말씀을 읽고도 믿지 않는다는 말은 이미 마음 안에서 ‘믿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 없어서 못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싫어서 안 믿는 것입니다.
믿기 싫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도 믿으려하지 않고 또 믿지 못하는 핑계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믿는 것도 나의 결단이지만 믿지 않는 것도 나의 아집에서 비롯됩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부자가 착해서 형제들을 지옥에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에 간 사람이 그렇게 착할 리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형제들이 지옥에 오게 되는 것이 자신의 탓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는 형제들이 잘못되면 하느님 탓을 하거나 부모나 사회, 혹은 세상 탓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형제들이 죄를 짓고 사는 것은 자신의 탓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지옥에 오게 된다면 가뜩이나 고통스러운 지옥에서 또 자신들을 원망하는 형제들에 의해 괴롭힘을 받을까봐 그렇게 청하게 된 것입니다.
부자는 라자로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 길거리를 지나가다 누워있는 행려자의 이름을 물어보거나 알려고 하겠습니까?
이는 라자로가 그 집 앞에 오래 있었거나 혹은 지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부자인 것도 자신이 잘 해서 그런 것이고 타인이 가난한 것도 타인의 운명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지옥가야 할 이유가 된 것입니다.
마치 카인이 아벨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내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물어보며 동생의 죽음과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아프리카를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7초에 한 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는 것이 다 그들 탓일까요?
내가 나누지 못하는 탓은 아닐까요?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줄 수 있었는데도 그냥 바라만 보고 있다면 누구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자녀가 어머니의 탯줄을 통해 영양분을 공급받듯 모든 사람은 나를 통해 은총도 받고 저주도 받습니다.
폼페이라는 도시의 사람들이 40세를 넘기는 일이 드물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수도관 이음세가 납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납이 얼마나 몸에 안 좋은 것인 줄을 몰랐습니다.
부자의 형제들이 지옥에 오게 된 이유는 부자의 죄가 그들에게 흘러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우리 존재가 이웃에게 영향을 줍니다.
세상이 온난화 되는 것도 나의 탓이고 공기가 탁해지는 것도 나의 탓입니다.
내가 변화되면 공기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나는 변하려하지 않으며 남의 탓만 하다가 우리도 심판을 받고 나서야 나의 탓이었음을 깨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너무 늦습니다.
내가 바뀌어야 다 바뀔 수 있습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가 가족이 잘못되고 있는 것이나 이웃이 굶고 있는 것을 자신의 탓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거지 라자로는 길거리의 개들에게 자신의 종기에서 나오는 것들이라도 내어줄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그를 천국으로 이끈 것입니다.
이웃의 죄는 나의 죄이고 이웃의 아픔은 나의 책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고통을 보시며 당신의 것으로 여기셔서 인간의 죄를 당신이 다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로움이 당신을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세상과 연결되어 있기에 세상의 죄는 나의 죄가 됩니다.
라자로처럼 은총의 통로가 되어 세상을 변화시킬 책임을 느껴야 천국으로 향할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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