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7일 [사순 제2주일]
복음: 루카 9,28ㄴ-36
< 기도의 효과를 알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
유튜브 채널 ‘마인드풀 tv’의 운영자가 말하는 명상이 주는 효과입니다.
그녀는 심한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삶을 포기하고 싶은 지경까지 삶이 무너졌지만 신경안정제 하나도 복용하지 않고 명상으로만 자신의 모든 정신적 문제를 극복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명상을 전파하고 있고 구독자수가 상당히 많은 인기 유튜버가 되었습니다.
물론 삶도 매우 생기 넘칩니다.
그녀가 주장하는 명상의 효과는 1. 현실개선, 2. 정신건강을 상승시키고 스트레스를 줄여줌, 3. 두뇌가 변함, 4. 건강이 개선됨 등입니다.
명상을 주장하는 이들 중 대부분은 ‘자신의 생각이 세상을 창조한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불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그 마음 때문에 불안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 환경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정마인드’를 가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하는 호흡을 가져와 의식적으로 호흡을 함으로써 자아와의 거리를 두게 만드는 것이 명상입니다.
모든 불안과 우울, 스트레스는 무의식에서 올라오기 때문에 호흡을 의식적으로 하면 무의식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현대 과학자들이 명상을 많이 하는 티베트 스님들의 뇌를 조사한 결과 전두엽이 다른 사람들보다 발달해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물론 게임만 하고 인터넷을 많이 하는 사람들의 뇌는 퇴화한다는 것도 밝혀냈습니다.
우리 자신은 우리가 노력하여 발전시키고 창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분이 좋아지니 스트레스에서 오는 병들을 이길 수 있게 되어 건강이 좋아진다는 것도 맞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이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만약 전 세계의 8세 이하의 아이들이 명상을 교육받는다면 우리는 단 한 세대 만에 전 세계의 모든 폭력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명상이라고 하는 것 안에 주님의 현존을 넣으면 기도가 됩니다.
명상은 자아로부터 우리를 분리시켜놓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걷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바다는 우리의 잠재의식, 혹은 자아라고 하는데 그 자아에 빠져들지 않게 만드는 것이 명상, 혹은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자아의 부정적인 본성을 기도를 통해 ‘감사’로 이끌라고 하는 것이 명상과 기도의 공통점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한 일이 더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내 마음을 부정적이 되지 않게 만들면 삶이 훨씬 수월할 수 있다는 것은 신앙이 있건 없건 간에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현실이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긍정적 마인드를 가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기도나 명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현실은 우리가 창조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맞닥뜨린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시는지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 현실 앞에서 어떻게 긍정적이 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세상에 내려왔지만 인간은 그분을 무시하고 침 뱉고 십자가를 지우고 조롱했습니다.
이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긍정적인 마인드를 유지할 수 있으셨을까요?
‘기도’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 타볼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기도가 어떻게 부정적 현실 앞에서 긍정적으로 살 수 있게 해 주는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예수님은 기도 가운데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새 계약과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길이 꼭 필요함을 되새기십니다.
기도하면 이렇듯 부정적인 생각에만 빠져있는 사람이 닿을 수 없는 높은 진리를 깨우치게 됩니다.
그래서 왜 어려운 현실이 닥치는지 이해하게 되고 그것을 극복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래서 현실이 부정적이더라도 그 부정적인 현실 뒤에 있는 부활의 영광과 그 열매들을 봅니다.
그래서 힘든 현실도 잘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안에서 깨닫는 이런 진리들은 우리 자신을 주님의 뜻에 봉헌하게 만듭니다.
마치 빵과 포도주가 봉헌되면 그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되돌아오듯 봉헌은 아픈 것이지만 더 좋은 것으로 되돌려주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 자신을 봉헌할 수 있게 만듭니다.
이 자기봉헌이 자신과 주의의 현실을 재창조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모습이 환하게 빛나셨듯이 나의 본성이 변화됨을 자신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생각과 하나인 줄 알았지만 생각은 뱀과의 대화였음을 깨닫게 되고 그 어둠에서 멀어지며 빛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어떤 선택이 자신을 더욱 빛나게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깊은 생각에 사로잡히는 사람보다 생각 없이 즐거운 아이들의 얼굴이 훨씬 환하게 빛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자아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만나고 온 모세의 얼굴이 빛났던 것처럼 기도하는 사람의 얼굴은 빛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만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믿음을 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환하게 변하시는 것을 보고는 그 제자들이 큰 믿음을 가지게 된 것처럼,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전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40일 동안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온 모세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빛나고 있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그들은 모세를 보고 하느님의 현존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기도하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은총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리더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신 다음 하늘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을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더 기도해야합니다.
그래야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그 책임자의 말을 잘 따르도록 마음을 이끌어주십니다.
기도는 자신만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나와 이웃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힘인 것입니다.
제가 성지순례 갔을 때 함께 한 인솔자가 사제가 되려다가 나와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결혼하여 아기를 가지게 되었는데, 태중의 아기가 불구로 태어나거나 사망할 것이라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가톨릭신자는 낙태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나오는데 병원 문 밖에 나오니 다리에 힘이 풀려 그냥 털썩 주저앉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혼자 기도할 수 있는 수도원 성당에 들어가 한없이 울었습니다.
신발을 십자가에 집어던지며 심한 욕까지 했다고 합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리 고통을 주시냐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시지 왜 죄 없는 아이에게 그러시냐고 밤새 소리소리 지르며 울었다고 합니다.
새벽 동이 터 올 때쯤에는 제정신이 들어 이젠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비뚤어진 십자고상을 바로 세우고 자세도 바로잡고 한 번만 더 도와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아이는 정상으로 태어났습니다.
리더는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체 앞에서 일정 시간만 머물러 있으면 먼저 내가 변화되고 그 다음엔 나에 딸린 사람들이 변화됩니다.
자신의 힘만으로 가족이나 단체를 이끌려는 사람은 리더의 자격이 없습니다.
나의 부족함을 기도로 채울 줄 아는 사람이라야 참 리더의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기도하셨다면 우리도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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