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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1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3-16 조회수 : 519

3월 16일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오 5,43-48 
 
< 화나는 나를 볼 때 이미 화에서 벗어난 것이다 > 
   
‘화’에 대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먼저 “내겐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다.”고 말한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절친했던 클레토스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장성해 장군이 되어 친구인 알렉산더 대왕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클레토스가 만취해 많은 군사들 앞에서 알렉산더 대왕을 모욕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화가 치민 알렉산더 대왕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옆에 서 있던 군병의 창을 빼앗아 클레토스에게 던졌습니다.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창은 자신의 절친한 친구의 가슴을 뚫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절친한 친구를 죽였다는 생각에 너무 괴로운 나머지 알렉산더 대왕은 자살까지 하려 했습니다. 
땅은 정복했으나 정작 자신은 정복하지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소크라테스입니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가 친한 친구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화가 난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계속 큰 소리로 떠들어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내의 분노를 애써 무시하고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갑자기 커다란 물통을 들고 거실에 들어오더니 소크라테스의 머리에 물을 쏟아버렸습니다. 
순식간에 봉변을 당한 소크라테스는 수건으로 천천히 물을 닦아내며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너무 놀라지 말게. 천둥이 친 후에는 반드시 소나기가 내리는 법이라네.” 
 
소크라테스는 화가 나지 않았을까요? 
그런 상황에서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화에 사로잡힐 수 없는 곳에 자신을 옮겨놓은 것뿐입니다. 
화를 내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화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화가 나는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내 안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바람 불 때는 배를 바다에 안 띄우면 됩니다. 
화와 안 좋은 감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그것들이 일어나는 곳으로부터 탈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방법이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일어나는 일이 내 자신이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나로부터 벗어납니다.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마치 출렁이는 바다에 이리 휘청 저리 휘청 하고 있다가 헬기에 구조되어 하늘에서 출렁이는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분명 내 안에서 화가 나고 있는데 이젠 그렇게 화나는 내가 내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기도하면 이렇게 자아와 본래 나의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화가 나는 자아를 자기 자신과 구별하지 못할 때 고통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위로위로 더 올라갈수록 이제 자아에서 화가 올라오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자신의 감정을 초월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질 때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자아는 본성적으로 화를 내고 못된 욕정을 일으킵니다. 그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통해 나를 들어 높이면 그런 몹쓸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내 자신을 들어 높이면 제3자의 입장에서 나 자신을 볼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나와 이웃과의 관계도 보입니다. 
산 위에 올라가서 밑에 있는 동네를 본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그 밑에서 아웅다웅하던 일들이 조금은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 
위로 올라가니 모든 사람이 결국에는 차이가 없게 보이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은 모두에게 같은 태양이 떠오르게 하십니다.  
 
태양처럼 높아지면 이제 지역이나 사람들을 분별을 해서 빛을 주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 사랑이 갑니다. 
그 본성이 사랑이라는 말은 이렇게 높이 계시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느님처럼 완전해지려면 하느님처럼 높은 곳에서 내려다봐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사람과 멀어지는 것은 오히려 사랑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남편보다 자신과만 함께 있어주며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남편을 더 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으려고 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려거든 부모나 아내나 자녀들을 미워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들에게서 떨어지지 않고서는 참 사랑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결혼하셨다면 어떤 남편이 되셨을까?’라는 조금은 불경스런 생각을 해 봅니다. 
아마도 성모님에게 고통을 안겨주셨듯이 훌륭한 남편은 되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를 사랑하기 위해 가정은 소홀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가정생활을 잘 하고 있는 사람까지 불러내어 온전한 가정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베드로 사도가 아내를 덜 사랑했을까요? 
육체적으로는 멀어졌을 수 있어도 영적으로는 더욱 충만한 사랑을 했을 것입니다. 
더 태양에 가까워져 더 뜨거운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뜨거워지려면 더 위로 올라가야합니다.
이것이 아직 밑에서 따듯함을 바라는 이들을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마음으로 성모님을 떠나신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완전해지려면 나를 하늘로 들어 높여 태양까지 가야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불타고 있다면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같은 사랑을 뿌려주는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정도까지 높이 올라가면 분별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모두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완전한 사랑은 나를 높이 들어 올릴 때만 가능합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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