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6일 [재의 수요일]
복음: 마태오 6,1-6.16-18
< 나의 삶에 사순이 없으면 믿음도 없는 것이다 >
KBS, ‘TV동화 행복한 세상’에 소개되었던 사연입니다.
시장 통 작은 분식점에서 찐빵과 만두를 만들어 파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느 일요일 오후, 아침부터 꾸물꾸물하던 하늘에서 후두둑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소나기였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그치기는커녕 빗발이 점점 더 굵어지자 어머니는 서둘러 가게를 정리한 뒤 큰길로 나와 우산 두 개를 샀습니다.
그 길로 딸이 다니는 미술학원 앞으로 달려간 어머니는 학원 문을 열려다 말고 깜짝 놀라며
자신의 옷차림을 살폈습니다.
작업복에 낡은 슬리퍼, 앞치마엔 밀가루 반죽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감수성 예민한 여고생 딸이 상처를 입을까 걱정된 어머니는 건물 아래층에서 학원수업이 마치기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한참을 서성대던 어머니가 문득 3층 학원 창가를 올려다봤을 때, 마침 아래쪽의 어머니를 내려다보고 있던 딸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어머니는 반갑게 손짓을 했지만 딸은 못 본 척 얼른 몸을 숨겼다가 다시 삐죽 고개를 내밀고, 숨겼다가 얼굴을 내밀곤 할 뿐 초라한 엄마가 기다리는 걸 원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슬픔에 잠긴 어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그냥 돌아섰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어머니는 딸의 미술학원에서 학생들의 작품을 전시한다는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딸이 부끄러워할 것만 같아 한나절을 망설이던 어머니는 늦은 저녁에야 이웃집에 잠시 가게를 맡긴 뒤 부랴부랴 딸의 미술학원으로 갔습니다.
‘끝나 버렸으면 어쩌지?’
다행히 전시장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벽에 가득 걸린 그림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던 어머니는 한 그림 앞에서 그만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
비, 우산, 밀가루 반죽이 허옇게 묻은 앞치마, 그리고 낡은 신발.
그림 속엔 어머니가 학원 앞에서 딸을 기다리던 날의 초라한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습니다.
그날 딸은 창문 뒤에 숨어서 우산을 들고 서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 가슴에 담았던 것입니다.
어느새 어머니 곁으로 다가온 딸이 곁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모녀는 그 그림을 오래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으로.
‘사순’은 믿음을 가진 누구에게나 삶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습니다.
믿음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을 믿으면 보답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보답하려는 노력이 곧 사순의 시작인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라고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죄 때문에 죄인이 되시고 그분의 의로움을 나의 것이 되게 하셨음을 믿는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죄인이 되는 덕분으로 나는 하느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이면서도 하느님처럼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느님임을 믿게 되면 자신 안에 하느님이 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죄가 자아로부터 나오는 세 가지 원수 즉, 세속-육신-마귀입니다.
세속은 돈이고 육신은 성욕이며 마귀는 판단입니다.
이것들 때문에 내가 하느님의 자녀처럼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제1독서에서 요엘 예언자가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고 하듯 가슴이 미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마음을 다잡기 위해 어떻게 광야에서 40일을 보내야하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려면 이 세 가지를 죽여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그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즉, 세속은 청빈으로, 육신은 정결로, 마귀는 겸손한 순종으로 이겨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 세 덕, 청빈-정결-순명을 복음삼덕이라 부릅니다.
믿음이 생기면 필연적으로 이 복음삼덕을 키우는 광야의 시기를 거쳐야만 하는데 이는 40일이 아니라 평생을 의미하는 40년 동안 해도 부족합니다.
우리 평생의 신앙생활이 결국은 자아의 세 원수를 복음삼덕으로 이기려고 노력하는
광야의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청빈-정결-순명을 강화시키기 위해 세 가지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제시하십니다.
우선 청빈의 덕은 ‘자선’으로 길러집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리고 정결의 덕은 ‘단식’으로 길러집니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마지막으로 순명의 덕은 ‘기도’로 길러집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예수님께서 이 세 가지 실천방법을 알려주시며 빼놓지 않고 말씀하시는 것은 남의 눈을 의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행동으로 남에게 칭찬을 바란다면 이는 자아를 죽이려는 본 목적과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죽이기 위해 하는 행동인데 그것들이 자칫 자아를 더 크게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선과 단식과 기도의 실천은 내 자아가 죽는 것 하나에서 그 보상을 찾아야만 합니다.
남에게 인정받으려 무언가를 하는 사람은 결국 밑 빠진 독과 같아서 주님의 은총을 담아놓을 수 없게 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라고 말하는데, 이는 이런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사순절의 목적은 자아를 죽이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하는 것에 있습니다.
사순은 이렇게 우리 평생의 신앙생활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또한 일 년 중 ‘사순절’을 두는 이유는 새롭게 시작해보라는 뜻이 있을 것입니다.
사순절이 끝나면 바로 부활이 오기 때문에 사순절이 자아와의 싸움의 ‘시작’이라 말하면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간 유혹받으시고 끝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싸움은 죽음 직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도 사순절을 싸움의 시작이요 계기로 삼아야지 그때만 단순히 절제를 하고 끝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작년 사순절 때 습관일기를 써가며 여러 가지를 끊어보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순절을 하나하나 끊어가는 계기로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지금은 많은 것들이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 실천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 실천되는 것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작년의 사순절이 저에게 남긴 열매인 것 같습니다.
그만큼만 변화된 것입니다.
내가 결심한 것들이 사순절 때 반짝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내가 극기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더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오늘부터 또 새로운 것들을 도전해보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보려 결심을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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