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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3-01 조회수 : 513

3월 1일 [연중 제7주간 금요일]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 관계의 고리가 곧 생명줄 >


전에 소년원에 가서 여자 아이들의 고해성사를 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소년원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들어가서 고해를 주었습니다. 
알고 보니 살인이나 폭력, 강도 등의 큰 죄를 짓고 들어온 아이들이었습니다. 

중,고등학생 여자아이들이었지만 살인까지도 한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니 겁도 조금 났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 놀란 것은 이런 아이들의 마음이 매우 순수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당에서 같은 또래의 아이들의 고해를 듣을 때보다 더 깨끗한 아이들처럼 느껴졌습니다.  
 
자신을 키워주고 지금은 혼자 사는 할머니에게 죄송하다거나 또는 자신의 잘못으로 피해를 받은 사람들에게 죄송하다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실수를 해서 가족이나 친척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것에 대해 크게 뉘우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놀랐던 것은 고해를 본 수십 명의 학생들 중 단 한 명도 건전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이 죄를 지어 갇혀 있지만 이것이 어찌 이 아이들 탓이라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들은 본래 순수하게 태어났지만 마땅히 받아야하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이 힘든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에게서 사랑을 받아야 온전하게 성장하듯이 모든 사람은 본래 사랑을 받아야합니다. 
그렇게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을 알 수 있는 실험이 ‘하아로우의 원숭이 실험’입니다. 

아기 원숭이를 젖이 나오는 철사로 만든 차가운 엄마 인형 원숭이와 젖이 나오지 않는 포근한 털로 만든 엄마 원숭이 인형 사이에 두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보는 것입니다. 

젖은 먹어야하니 철사로 만든 엄마 원숭이에 붙어 젖을 빨고는 항상 포근한 털로 만든 원숭이 인형에 안겨 지냅니다. 

엄마의 존재는 낳아주고 젖을 먹여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사랑을 주어야 하는 의무를 지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이들은 부모님으로부터 “아이고 우리 아기 밥 잘 먹는다. 
똥도 잘 싸네?”하며 칭찬을 받아야만 ‘자아존중감’이 커집니다. 
자아존중감은 내가 내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만족해하는 마음입니다. 

미국의 한 시골에서 천연두로 동네 친구들과 형제들이 죽었지만 그레이스란 한 아이만 얼굴에 천연두 자국을 남긴 채 살게 되었습니다. 

도시에서 친구들이 괴물이라고 소리 질렀지만 어머니가 그 얼굴의 상처는 하느님께서 살려주셨다는 은총의 표지라는 말을 해 주셨기에 그레이스는 자신을 당당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와 결혼해 둘 다 미국 국회의원을 지냈다고 합니다. 

만약 어머니가 아이에게 자아존중감을 심어주지 않았다면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냥 자신을 비관해 죽어버리던가, 아니면 살더라도 행복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아존중감 대신 자존심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니 이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외적으로라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누가 경쟁심이 강하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을 좋아해 주겠습니까? 
그래서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더 외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나쁜 친구와 어울리게 된다면 그 그룹에서 인정받기 위해 솔선수범하여 나쁜 짓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소년원에 와 있는 이들의 운명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도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엉망이 되었고 하와도 아담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엉망이 되었습니다. 

꽃도 암컷이 있고 수컷이 있습니다. 
바람이나 나비, 혹은 벌이 수컷의 꽃가루를 운반하여 암컷에 수정시키면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그 열매 안에는 수컷과 암컷이 들어있습니다. 
그 열매에서 수컷과 암컷을 다시 분리해 낼 수 있겠습니까? 

한 번 수정이 되면 더 이상 분리될 수 없습니다.
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을 통해 결합된 둘은 이제 더 이상 분리될 수 없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떠나서는 온전히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부부도 갈라지면 온전히 커갈 수 없습니다. 
세속적으로 이혼하여 재혼을 하더라도 이전 혼인의 유대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기에 완전한 혼인의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새어머니가 아무리 잘 해 주어도 친어머니만 못 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말라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이 맺어주셨다면 가장 좋은 나무에 가장 알맞은 가지를 붙여주신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풍파 속에서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무에서 떨어져나가면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전기선이 끊기면 더 이상 집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관계의 고리가 곧 우리의 생명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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