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6, 27-38(연중 7주 주일)
연중 7 주일입니다.
봄이 오고 있습니다. 생명의 향기를 물신 풍겨옵니다 봄의 향기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에서도 생명의 향기가 우리를 휩싸고 돕니다.
<제1독서>에서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보복하지 않고 살려줍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갚지 않고,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경외한 까닭입니다.
<화답송>은 주님께서 자비롭고 너그러우심을 노래합니다. 또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는 주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를 가여워하심을 노래합니다.
<제2독서>에서는 흙으로 빚어진 첫째 아담의 모습에 이제 그리스도로 하여 천상의 본성을 지니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곧 그분처럼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땅은 하늘의 향기를 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생명의 향기가 봄의 향기입니다. 곧 봄의 향기는 땅을 파고드는 하늘의 향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천상의 향기가 가득, 진하게 우리에게 번져오고 세상을 물들입니다. 곧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는 말씀이 울려 퍼집니다.
우리는 누구나 갈등과 대립의 상황을 마주하고 살아갑니다. 인류사회를 괴롭히는 이러한 갈등과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이념이 끊임없이 이 사회를 지배해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께서는 대혁명을 일으키십니다. 새로운 인간관계와 새로운 인류사회를 제시하십니다. 곧 폭력이 아닌 사랑의 혁명입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 잘 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반면, 자기에게 잘못 해주는 사람에게는 잘못해주고,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사랑해주지 않는 것으로 돌려주거나 보복하는 이 논리를 정당성으로 내세우는 이해타산적인 이념을 깨뜨리는 일입니다. 단지 그러한 삶의 방식을 멈출 뿐만 아니라, 나아가 오히려 사랑과 선으로 보복하고 갚아줄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참 생명의 향기로 물들입니다. 참 생명의 아름다움입니다. 이 “아름다움은 진리와 선의 광채”(폰 발타사르, 플라톤)로 참 생명의 의미를 일깨워줍니다. 그것은 참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끼아라발레의 베르나르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충분하다. ~그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며 보상이 된다.
사랑은 이유를 찾지 않으며 자기 밖에서 이익을 찾지 않는다.
사랑의 이득은 사랑 그 자체이다.”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내가 잘했던 잘못했던, 나를 비난하고 미워하고 뺌을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어떻게 대응하는지요? 만약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기를 멈춰버린다면 그것은 중책일 것입니다. 그들이 한대로 똑같이 되돌려주거나 보복한다면 그것은 하책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선으로 갚는다면 그것은 상책입니다. 우리는 어떠한지요? 이 사랑의 복음을 상책으로 행하고 있는지요?
그런데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걸까요?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루카 6,35)라고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이는 우리가 이미 자비를 입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그 자비를 입어 새로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것을 이미 받아서 가진 존재이기에, 그것을 내어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자비로운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형상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처럼, 자비는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자비의 얼굴을 드러낼 수 있을까?
그것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그가 해주는 대로 돌려주고 보복하는 하책은 아예 말 것이며, 또한 심판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는 중책을 택하지도 말 것이며, 오히려 상책인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어라는 말씀입니다. 단지 심판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으면 나빠지지는 않지만 그저 그 자리에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주게 되면 우리 안에 심어준 하느님의 형상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심판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용서한 것은 아니지만,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게 되면 이미 심판과 단죄를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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