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의 어느 고등학교에 성공한 졸업생이 방문했습니다. 어떻게 왔느냐는 질문에 학창시절에 자신을 가르쳤던 선생님을 뵈러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선생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합니다.
“학창시절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소중하고 은혜로운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내 과목 중에서 무엇이 좋았는가?”라고 묻자, “글쎄요...”라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복도를 지나고 있는 저를 부른 뒤에 선생님께서는 무릎을 꿇고 신발 끈을 대신 묶어주셨습니다. 이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학창시절, 존경하는 선생님을 생각해보십시오. 뛰어난 언변으로 잘 가르치셨던 분이 아니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칭찬해주시는 분이었습니다. 또한 눈높이를 낮춰서 대화를 많이 나눴던 분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특히 남에게 기억되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의 작업을 해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묘비에 적고 싶은 글귀를 적는 것입니다. 세상이 당신을 어떻게 기억했으면 하는지 적어보십시오.
아마 ‘욕심 많고 이기적인 사람’, ‘사랑이 전혀 없는 사람’, ‘사람들에게 아픔만 준 사람’ 등의 묘비명을 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바로 내가 나누고 희생한 것들이 적히길 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내가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또 한 가지는 묘비명에는 길게 적을 공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선순위 목록의 가장 위에 놓은 것에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넉넉하게 챙겨주시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상태에서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부족함 안에서도 나눠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기쁜 소식은 부족함 안에서도 충분히 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역시 이 세상에 파견되었습니다. 주님의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파견되었습니다. 그런데 혹시 ‘다른 사람들이 하면 되지.’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정작 해야 할 것들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이 너무나도 부족하다면서 선교를 하기 보다는 불평불만만을 내 던지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의 일은 부족한 상태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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