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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31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1-31 조회수 : 275

어떤 중학교 여학생이 자신은 용돈을 달라고 엄마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용돈이 필요하면 말을 해야지, 왜 말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뻔해요.”라고 말합니다. 엄마의 반응은 뻔하다는 것이지요. 자신을 향해 화를 내면서 온갖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잔소리만 들을 뿐 원하는 용돈은 얻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지요. 만약 엄마에게 “용돈 좀 주세요.”라고 말을 했을 때, “요즘 어려운 일이 있나 보구나. 엄마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을까?”라면서 화내지 않고 이야기해주고 또 용돈도 준다면 이런 엄마를 향해서 “뻔하다.”라는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예상하는 반응을 상대가 하지 않을 때에는 절대로 ‘뻔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신 마음을 열고서 그 사람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주님께서도 절대로 뻔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 않습니다. 늘 뜻밖의 모습으로, 뜻밖의 사랑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뻔한 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활짝 열고서 받아들이는 의외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뻔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것만을 주장하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뻔한 예상을 상대방이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늘 나의 관점만 옳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닌 남에게 중심이 맞춰져 있는 사람은 상대방으로부터 절대로 뻔한 사람이 아닙니다. 대신 함께 하고 싶고 내 마음으로 드러내고 싶은 따뜻한 사람입니다. 

사랑은 자기중심적이지 않기 때문에 절대로 뻔할 수가 없습니다. 의외의 모습으로 뜨겁고 열정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랑입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주님의 뜨거운 사랑으로 채우는 우리가 될 때 주님을 이 세상에 환하게 드러내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러한 점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라고 질문하시지요. 등불은 주위를 밝게 밝히는 역할을 하는데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으면 그냥 꺼질 수밖에 없습니다. 꺼지지 않더라도 주위를 밝힐 수가 없게 되겠지요. 여기서 등불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이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늘 힘주어 강조하셨던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실천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말로만 사랑한다고 외치는 것? 아닙니다.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 그래야 세상의 환하게 비출 수 있는 사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보상을 이렇게 말씀해 주시지요.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바로 우리가 사랑에 힘쓴 만큼 주님으로부터 사랑이 주어질 것이며, 오히려 거기에 더 보태어서 받게 된다는 보상의 말씀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사랑할만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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