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청소년들의 행복지수가 너무 낮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미래라 할 수 있는 청소년들이 희망적이지 않으니 과연 우리나라에 어떤 희망이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책을 보니, 이런 모습들이 오히려 희망적이라는 아주 의외의 주장을 펴더군요.
일본을 예로 듭니다. 지금 현재 일본 젊은이들의 행복 지수는 역대 최고치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되었을 때 자신의 처지에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일본의 청소년들의 행복 지수가 올라간 것은 현재의 격차사회, 계급사회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자신들의 처지에 만족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일본의 고도성장기의 버블이 모두 꺼진 지금, 미래에 대한 희망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현실에 만족하게 된 것입니다.
행복지수가 낮음은 곧 행복한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단순히 행복지수가 낮다고 일찌감치 포기하고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지금 어렵고 힘들다는 생각을 품고는 있지만, 여기에 계속 머물 것이 아니라 여기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늘 희망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이 순간을 더욱 더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주십니다. 이를 군중에게 많은 것들을 비유로 가르치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이라는 순간을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해하기 쉽게 전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조금만 주의 깊게 주위를 둘러보면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사람들, 특히 지도층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쉬운 말씀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들으면 ‘아~~’라고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들의 주관심사는 ‘저 예수라는 사람을 제거할 수 있을까?’뿐이었기에 어떤 말씀을 통해서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을 기회를 과감하게 버리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일상 삶 안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긍정적이고 희망의 메시지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부정적인 마음으로는 절대로 주님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엉뚱한 곳에 신경 쓰지 마시고, 행복만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힘차게 나아갔으면 합니다. 그런 우리가 될 때, 주님의 작은 씨앗이 우리 안에서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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