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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2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1-29 조회수 : 429

1월 29일 [연중 제3주간 화요일] 
 
복음 : 마르코 3,31-35 
 
< 자신이 믿는 본성이 자신이 따르는 법이다 >

아프리카에 한 마을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이들이 숲속에서 표범 새끼를 잡아왔습니다. 
새끼지만 ‘표범’을 아이들이 데리고 노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여서 다들 나와서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밖이 소란스러운가하고 마을의 추장이 나왔다가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애들아, 너희들 그거 어디서 잡았니?”
“숲속에서 혼자 울고 있어서 데려왔어요.”
“어미가 찾아오면 어떻게 하려고?”
“어미는 없는 것 같던데요?” 
 
“얘들아, 그래도 표범은 사람을 잡아먹으니까 빨리 내다 버려라.”
“괜찮아요, 여태까지 계속 풀만 주는데도 잘 먹어요!”
“지금은 새끼니까 그렇지! 나중에 크면 너희들을 모두 잡아먹고 말거다!” 
 
어른들이 아무리 겁을 주고, 버리라고 해도 아이들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일단은 두고 보기로 했습니다.
새끼 표범은 자라면서 풀만 먹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표범은 금세 큰 표범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순했습니다. 
아이들과 뛰기도 하고 같이 장난도 치면서 즐겁게 놀았습니다. 
먹을 때도 같이 먹고, 잘 때도 같이 잤습니다.
덩치만 컸지 고양이와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은 전과 같이 표범과 함께 정글로 놀러갔습니다. 
한참을 재미있게 놀다가 한 남자아이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빠르게 달리다가 넘어진 터라 무릎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습니다. 
너무 아픈 나머지 아이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표범이 제일 먼저 달려왔습니다. 
앞서 가던 아이들도 다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표범은 안쓰럽다는 듯이 아이의 무릎에 있는 상처를 혀로 핥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표범의 눈빛이 이상해졌습니다.  
 
원래, 고기를 먹는 동물인 표범이 드디어 피 맛(?)을 본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레미야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에티오피아 사람이 자기 피부색을, 표범이 자기 얼룩을 바꿀 수 있겠느냐? 
그럴 수만 있다면 악에 익숙해진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예레 13,23) 
 
이 말씀은 본성을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절대 행동이 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행위를 변화시키는 종교가 아니라 새로 태어나는 종교를 믿고 있습니다.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부모를 필요로 한다는 말이고 그렇게 새로운 가족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탄 배가 해적선이면 아무리 착한 사람도 해적질을 하는 것이고, 그 배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오는 전함이라면 모두가 전쟁 영웅으로 환영받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가 어느 배에 타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이 배의 이름이 ‘본성’입니다. 
 
인간이라는 공동체도 하나의 배입니다. 
그 배에 속하기 위해서는 그 배의 뜻을 따라야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뜻이 있습니다.  
 
뱃속에 있는 아기를 향한 부모의 뜻은 무엇일까요?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하여 자신들처럼, 아니 그보다 더 잘 살아가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기는 먼저 자신이 짐승이 아니라 부모와 같은 사람임을 믿고 그 다음은 부모가 어떻게 사는 지를 살펴야하고 부모처럼 살려고 노력해야합니다.  
 
부모는 계속 “너는 인간이다!”라고 하는데, 개와 놀기를 좋아해서, “아뇨, 저는 개에요. 개 할래요.”라고 한다면 결국 진정한 가족이 되지 못합니다.  
 
본성은 그 사람이 믿는 부모에 의해 결정됩니다.
나의 부모가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때 그의 본성은 인간에서 하느님이 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서 먼저 “저는 하느님입니다!”를 고백하고 매사에 하느님으로서 살아가기를 결심하면 나는 그분의 가족 안에 든 것이고 그분이 선장인 배에 탑승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느님의 뜻, 곧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사랑임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사랑으로 살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 나의 뜻을 하느님처럼 살려고 하는 데 둘 때 우리는 하느님과 한 가족이 됩니다. 이를 위해 하나만 알면 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신 것처럼 나도 사랑임을 알면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본성이고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사랑입니다. 
우리 각자가 사랑이라고 믿고 고백할 때 하느님의 가족이 됩니다. 
우리는 계속 이렇게 고백합시다. 
 
“저는 사랑입니다. 저는 사랑입니다. 저는 사랑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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