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8일 [연중 제3주간 월요일]
복음 : 마르코 3,22-30
<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믿을만하다 >
우리나라 영화 중 ‘친구’(2001)가 있습니다.
평생 쌓아온 우정도 현실적인 어려움 앞에서는 한 순간에 원수처럼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모든 관계가 그렇습니다.
오래 사귀었다고 더 친해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래 쌓아온 관계라도 모래성처럼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사람을 믿는다는 순진한 마음으로 수없는 배신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누가 물어봐도 그렇게 대답합니다.
특별히 자신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더 안 믿습니다.
사람은 약하고 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행동보다는 내 자신을 통해서 더 잘 알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굳건히 서 있기에는 너무도 약합니다.
저도 제 생각이 자주 바뀌는 것을 알기에 자신을 믿지 못합니다.
자신을 믿는 사람이 사실 제일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조선왕조 말기,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을 때 누구보다도 세상 물정에 눈이 밝았던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기 전에 이미 영어를 배워 조선을 노리던 미국의 친구가 되었고, 러시아의 입김이 세어질 때는 친러파로 일했으며, 일본이 러시아를 이기자 친일파 앞잡이가 되어 국무총리까지 역임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배신의 아이콘 이완용(1858-1926)입니다.
시대적으로 보면 굉장히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고 성공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승리한 삶을 살았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승리는 자신을 이기는 데서 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옳음을 절대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배신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을 배신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생각에 대한 믿음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굳게 믿으면 절대 자신을 이길 수 없어 자신에게 이용당하고 남도 이용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을 믿는 사람은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아기가 자신만을 믿으면 부모가 없어도 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기는 지혜로워 부모가 꼭 있어야하고,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사랑만을 갈구합니다.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은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사랑의 힘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령을 통해 부어지는 것이고(로마 5,5), 성령은 기도를 통해 우리 안에 오십니다.
사랑의 불은 우리 안에서 꺼질 수도 있는데 그 불이 꺼지게 만드는 경우는 죄를 지을 때입니다.
그러니 죄를 짓는 사람은 더 믿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은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믿는 사람은 죄를 이기기 위해 기도합니다.
가장 큰 죄는 자신을 믿는 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을 주시는 성령은 하느님으로부터 오십니다.
하느님은 부정하더라도 사랑은 부정하지 말아야합니다.
부모는 필요 없다고 하더라도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임을 부정한다면 그 아이에겐 희망이 없습니다.
아이가 사람의 사랑을 받지 않고 늑대의 사랑을 받으면 자신이 늑대라고 믿고 늑대처럼 밖에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은 부정하더라도 사랑의 필요성까지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에게 사랑이 필요하고 그 사랑을 받는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만 한다는 것까지 부정하면 영원히 죄에 매이게 됩니다.
영원한 죄는 영원히 자신만을 믿는 죄입니다.
그런 사람은 배신의 아이콘이 되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들어올 수 없게 됩니다.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반드시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불을 끄지 않기 위해 죄를 짓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이런 사람이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은 믿을만합니다.
사랑을 믿는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인 것입니다.
자신을 믿는 사람을 믿지 말고 사랑을 믿는 사람을 믿어야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사랑을 믿지 않고 필요 없다고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합니다.
사랑이 곧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