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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27일 _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1-27 조회수 : 420

1월 27일 [연중 제3주일] 
 
복음 : 루카 1,1-4;4,14-21 
 
<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나의 행복이다 > 
   
1780년 청나라 건륭황제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조선에서 파견된 사절단 가운데 박지원이란 인물이 있었습니다. 
비록 벼슬은 없었어도 성리학에 빠져 있던 다른 사절단들과는 사뭇 다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명나라의 성리학을 숭상하던 양반들은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 만주족 사람들을 오랑캐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절단임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사람들은 물론 자신들을 맞아들이는 만주족 한인들에게까지도 무시하는 행동을 자주 하여 미움을 샀습니다.  
 
공부에 대한 맛을 잃고 과거시험을 포기한 박지원은 오히려 청나라를 여행하며 놀라움과 기쁨에 ‘열하일기’라는 책을 씁니다.  
 
당시 건륭황제가 열하라고 하는 곳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었기 때문에 열하까지 가기 위해 청나라를 여행하며 보고 느낀 것들을 쓴 기행문입니다. 
 
우선 청나라에 들어가 가장 놀랐던 것은 집을 짓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크기의 벽돌과 기왓장을 구워 빈틈없이 집을 지었습니다. 
튼튼한 것은 당연하고 조선의 가옥처럼 뱀과 쥐가 드나드는 구멍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선 짚과 섞은 진흙으로 벽과 지붕을 만들어 비가 오면 무너지기 쉬웠고 갈라짐이 심해 쥐와 뱀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청나라식의 집짓기를 조선에도 들여야 한다고 열하일기에 썼지만 조선 양반들은 무식한 되놈들의 집짓기를 양반의 나라가 왜 따라야하느냐고 다들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가 또 놀랐던 것은 ‘길’이었습니다. 
청나라는 길이 매우 잘 닦여있었고 마차의 사용이 매우 편하게 되어 있어서 문물의 이동이 원활하였습니다. 
그러니 각자가 원하는 것들을 어느 지역에서나 어렵지 않게 싸게 팔 수 있었습니다. 
 
반면 조선은 길이 거의 닦이지 않아 각 지역의 특산품은 거의 그 지역에서 소비되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그것들을 다른 지역에서 사려면 엄청난 가격을 지불해야했습니다. 
그러니 국경지대에 사는 청나라 상인들은 조선의 안 좋은 도로사정을 이용해 자신들 나라의 물건들을 싼 값에 사서 조선에서 비싸게 팔며 큰 이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박지원은 빨리 조선도 길을 닦아 문물교환이 쉬워져야 돈이 청나라로 빠져나가지 않고 국고도 튼튼해질 수 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길을 내면 외적의 침입만 용이하게 만들뿐 다 소용없다며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문체가 너무 천박하다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하여 사람들이 읽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참조: ‘금서가 된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써에이스쇼, 유튜브] 

청나라에서 함께 다닐 때 박지원과 그가 동행한 양반이나 학자들과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요?
박지원은 청나라의 문명에 놀랐고 더 많은 것들을 보기 원했습니다. 
사절단이 청나라를 깔보는 행위에 건륭황제가 화가 나서 이들을 귀향 보내려 했을 때 박지원은 오히려 더 많은 청나라 문물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서 내심 기뻐했다고 합니다.
더 머물고 싶었다면 행복했다는 말입니다. 
 
반면 양반들은 아예 청나라를 깔보면서 빨리 빠져나오는 것만을 원했습니다. 
그들은 거만한 자세로 당시 조선에 비할 바가 안 되는 엄청난 부와 문물을 소유했던 청나라 사람들을 깔보며 자신들을 들여 높이려 하였습니다. 
기분이 나빴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조선에 돌아와서는 야만적인 만주족들이 세운 청나라에서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누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일까요? 
바로 기쁜 소식을 접하고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기뻐야 전하고 싶을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을 전합니다. 
이것은 당연합니다.  
 
내가 기쁘면 기쁜 소식을 전하게 돼 있고, 내가 우울하면 우울한 이야기를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먼저 그 복음이 나의 것이 되어야합니다. 
짜증난 표정으로 복음을 전해봐야 짜증을 전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하는 이는 반드시 기뻐야합니다. 
누구를 만나도 기뻐야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어떤 일이 일어나든 기뻐야 그 안에 기쁜 소식을 품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며 일부러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은 자신이 더 아픈 사람입니다.  
 
내가 아프면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낄 수 없어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면서도 알아차리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아픈데 더 아플까봐 사람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기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빨리 그 기쁨을 전해주기 위해 사람을 만나는 것을 꺼리지 않습니다.
     
사람들 속에서 행복하면 “나는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족이 함께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못하다면 “저는 여기 누군가 때문에 행복하지 못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이웃에게 무엇을 전하고 있는 사람인지 알아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괜히 불안하게 만들고 어떤 사람은 편안하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은 불안하고 어떤 사람은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바로 나의 행복입니다.
이를 위해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과 상관없이 행복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는 것입니다.  
 
나의 행복이 사람들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면 주위 사람들이 나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혼자 있어도 행복할 수 있는 기술이란 바로 성령을 충만히 받을 수 있는 기술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기도의 능력’인 것입니다. 
기도할 줄 알면 성령으로 행복할 줄 압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이기 때문입니다(갈라 5,22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쁜 소식을 전하고 해방을 선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가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지금 내가 기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이는 마치 빵장사를 하는 사람이 빵을 먹지 못하여 허기진 것과 같습니다. 
누가 그 빵을 믿고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우리 마음 안에 기쁨이 솟구치게 해야 합니다.
내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나의 행복입니다. 
이웃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성령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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