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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2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1-25 조회수 : 365

1월 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복음 : 마르코 16,15-18 
 
< 믿음이 만드는 내 그릇의 크기 >

가난했던 자신의 아버지와 부자였던 친구 아버지에게서 동시에 인생을 배운 로버트 기요사키가 쓴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 이런 예화가 실려 있습니다. 
 
어떤 마을 촌장이 물을 공급해주는 사람과 계약을 원한다는 공고를 냈습니다. 
딱 2명 하고만. 
에드가 먼저 땄고, 신이 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며 두 개의 양동이로 호수에서 물을 날랐습니다.  
 
빌은 한동안 마을을 떠나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에드는 경쟁자가 없어서 더욱 신나게 양동이로 물을 나르며 돈을 벌었습니다. 
 
여러 달이 지난 후 빌은 양동이 두 개 대신 사업 계획을 짜고, 투자자 네 명을 모으고, 일을 할 사장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또 여러 달이 지나고 건설 팀과 함께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일 년 동안 빌의 팀은 아주 두꺼운 강철 송수관을 건설해서 마을과 호수를 연결했습니다.  
 
빌은 일을 하건 안 하건 매일 많은 돈을 얻었습니다. 
에드는 평생 일만 했습니다. 
이야기 끝. 
 
에드와 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릇 크기의 차이’입니다.  
 
에드는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죽을 때까지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판단하고 있었고, 빌은 여유 있게 좋은 일을 많이 하면서도 큰돈을 벌며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큰 그릇이 비록 늦게 차기는 하지만 어느 시점이 지나면 두 사람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신앙에도 각 사람의 그릇 크기 차이가 있습니다.
각자가 채워가는 믿음의 크기가 다른 것입니다.  
 
어떤 그릇은 깨져서 못 쓰고 어떤 그릇은 형편없지만 귀한 것이 담겨있을 수 있고 또 어떤 그릇은 좋지만 오물이 담겨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그릇들을 만드신 장본인이시기에 당신 좋은 그릇이 잘못 사용되고 있다면 그냥 두실 수는 없으십니다.  
 
나쁜 그릇에 좋은 것이 담겨있다면 좋은 것을 좋은 그릇에 담고 나쁜 그릇은 버립니다.
반대로 좋은 그릇에 나쁜 것이 담겨있다면 그 안의 오물을 덜어내는 수고를 감내하시면서라도 좋은 그릇은 합당한 용도에 사용하십니다.  
 
좋은 그릇인데 잘못 사용되고 있었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오늘 회심축일을 맞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 회심 축일을 지내며, 특별한 사람에게 은총이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사람에게 내리신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도 현대의 바오로 사도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인도의 귀족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 수녀님으로서의 삶에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그릇은 그것에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수녀원을 떠날 생각을 하시던 중 기차역에 쓰러져있는 행려자에게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목마르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들었을법한데 다른 사람들은 아무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그 목소리에 반응할 그릇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만이 주님의 부르심을 깨닫습니다.
그 목소리에 반응할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마더 데레사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시고 당신을 믿게 하셨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꿈에 베드로 사도를 만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하늘나라를 가난한 사람들로 꽉 채우겠습니다.” 
 
이것이 마더 데라사의 그릇이었습니다. 
이 그릇에 귀족 아이들만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서의 삶이 만족스러울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뜻에 알맞은 그릇만 되면 어떻게든 쓰십니다. 
 
그렇다면 나의 그릇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바로 내가 평가하는 나의 가치대로 만들어집니다.  
 
내가 평가하는 나의 가치를 ‘자존감’이라고 합니다. 
물론 내가 평가하기는 하지만 그 값은 다른 누군가가 쳐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랑받는다’라고 합니다. 
누구든 사랑받는 만큼 그릇이 성장합니다.
자신이 그럴만한 사람임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갖은 희생을 했는데도 자녀는 ‘나는 어떤 도움도 안 되는 인간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가 주는 사랑에 우리는 부모가 믿어주는 그릇의 크기를 믿게 됩니다. 
처음엔 이렇게 부모의 사랑에 의해 그릇 크기가 정해지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자신이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받으면 됩니다. 
 
내가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교만일까요? 아닙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도 “저는 개에요!”라고 말하는 것이 교만이자 불효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이 하느님의 어머니까지 되실 수 있는 그릇임을 믿으셨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입니다.
그것을 믿으라고 부모가 자녀에게 그렇게 하듯, 하느님께서도 당신 생명을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 사랑 앞에서 “우리는 그저 한 인간에 불과해요. 제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할 수 있겠어요.” 라고 말하는 것이 교만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으로서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그런 자존감을 회복해야합니다.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라면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생각하는 것과 같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젊은이여, 비전을 가져라.’라고 말했지만, 내가 누구인지 알면 그것에 맞는 비전은 저절로 갖게 됩니다. 
내가 개라고 믿으면 네 발로 걷는 비전을, 사람이면 두 발로 걷는 비전을, 하느님이라 믿으면 물 위를 걷는 비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보고 그동안 해 온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어 그렇게밖에 쓰일 수 없었기에 자신의 탓이 아님을 압니다. 
그저 주님께서 자신을 써 주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만 묻습니다. 
우리가 믿어야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회개’의 믿음인데, 죄 짓는 보통 사람으로 사는 것보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큰 행복임을 믿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세례’의 믿음, 혹은 ‘복음’에 대한 믿음인데,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대로 하느님께서 나의 아버지이심을, 내가 하느님의 자녀이자 하느님임을 믿는 것입니다.  
 
자녀를 이런 믿음으로 키우면 돈 벌어 부자가 되라고 가르치는 것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람이라고 믿게 할 것인지, 하느님이라고 믿게 할 것인지 정해야합니다.
그것에 따라 아이의 그릇 크기가 달라집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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