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3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
복음 : 마르코 3,1-6
< 예수님의 법: “괜찮다. 사랑한다.” >
스타강사 김미경 씨가 잘 나가다가 논문표절 문제가 드러나 곤두박질 쳐서 혼자 고난을 이겨내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매주 TV에 나와 청년들에게 열심히 일하며 당당하라고 외치던 그녀는 이제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은 쪼그라든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혼자 울고 하염없이 걸으며 하늘의 별과 대화를 했습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이기에 극단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몇 십 년 전의 실수였지만 ‘내가 왜 그랬을까?’라며 한없이 후회하고 또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걷고 걷기를 몇 달을 거듭한 끝에 마음 안에서 이런 음성을 듣게 됩니다.
“괜찮다. 사랑한다.”
지금까지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후회 때문에 죽을 듯 고통스러웠지만 ‘강의 안 하면 어때, 미경아. 너는 왜 네 탄생보다 꿈을 더 사랑하니?
너는 숨만 쉬고 있어도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목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다시 어깨를 펴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강의를 못하게 되었지만 새롭게 옷을 디자인해서 만드는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안엔 두 목소리가 있습니다.
한 목소리는 “왜 그랬니?”라고 죄책감을 주는 목소리고, 다른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데 항상 “괜찮다. 사랑한다.”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왜 그랬을까?’라는 자아의 질책소리에 민감하여 과거에 사로잡혀 거의 우울증 환자처럼 미간을 찌푸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를 하면 그래도 주님께서 “괜찮다. 사랑한다.” 라고 말하고 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그 믿음이 더 확고해집니다.
‘이런 죄인인 나에게 한 번도 거부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은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구나.
주님은 내가 어떤 죄를 지어도 사랑해주시는구나!’
우리는 죄책감을 주는 목소리와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두 목소리 가운데 어떤 목소리가 나를 지배하게 만들 것인지 결정만 하면 됩니다.
하나는 나를 쪼그라들게 만들고 하나는 나의 어깨를 펴게 만듭니다.
쪼그라든 사람은 계속 쪼그라든 삶을 살아가게 되고 어깨를 편 사람은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그것도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못마땅해 합니다.
율법을 어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은 오그라든 손을 펴게 하고, 굽어진 허리를 세우게 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자신들이 인정받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누구든 자신과 이웃을 어떤 규정으로 주눅 들게 만들면 율법학자, 바리사이입니다.
자신과 이웃을 주눅 들게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는 주눅 들게 하는 법에 의해 지배받고 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나무 뒤로 숨은 것은 주눅 들었다는 뜻입니다.
아담은 자신 안에서 “너는 죄를 지었어!”라고 말하는 자아를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아는 하도 잔인해서 율법을 이용해 자신에게 죄책감을 심어줍니다.
그리고 또 자신의 죄책감을 줄이기 위해 타인을 율법으로 얽매이게 해서 심판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십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당신께서 다 덮어주시겠다는 약속의 상징입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율법에 지배받는 율법주의자와 그래도 주님께서 다 용서해주신다고 믿는 참 신앙인, 두 부류가 존재합니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자아의 목소리를 안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재빠르게 자아의 법에서 주님의 현존이라는 더 큰 믿음의 법으로 방향을 틀어야합니다.
주님의 현존과 주님께서 바라봐주심이 율법의 굴레를 벗어나게 만들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법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십니다.
그 시선은 우리를 쪼그라들게 만드는 질타하는 시선이 아니라 우리의 쪼그라든 마음을 펴게 만드는 사랑과 안아줌과 위로입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가 되지 않으려거든 먼저 자신이 그 사랑의 법에 지배받고 있어야합니다.
김희아 씨는 딸이 뛰다 넘어져도 “어머, 넘어졌는데, 이것밖에 안 다쳤네. 감사합니다.” 라고 말해준다고 합니다.
“좀 똑바로 보고 다니라고 얼마나 엄마가 얘기했니?”라고 야단치면 아이는 더 주눅 들게 됩니다.
엄마가 아담과 하와에게 뱀이 한 일을 똑같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김희아 씨의 딸은 길을 가다 넘어져 손에 피가 나고 있어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엄마, 넘어졌는데 이것밖에 안 다쳤어요. 참 다행이지요.”
엄마가 심판관이 아니라 “괜찮다. 사랑한다.”의 법으로 지켜주고 있음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도 항상 우리를 그렇게 자비롭게 봐 주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 믿음으로 나도 자유로울 수 있고 죄책감에 주눅 들어 있는 사람들의 어깨도 펴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리사이, 율법학자가 안 되기 위해 절대로 자신과 이웃을 심판하지 말고 항상 자신과 이웃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괜찮다, 사랑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