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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21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1-21 조회수 : 370

1월 21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복음 : 마르코 2,18-22 
 
< 모든 율법에 우선하는 법, 주님 현존에 대한 믿음 >

‘난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1998)란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내용보다는 제목 때문에 인기를 끌었던 영화입니다.  
 
청년 네 명이 여름에 놀러가다가 차로 사람을 치여 잘못을 감추기 위해 그를 바다 속으로 던져버립니다. 
아무도 보지 못했을 것이라 여겼지만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고 그들에게 보복을 하는 내용입니다.  
 
내용보다는 내가 은밀히 지은 죄를 다른 누구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공포로 다가오는 영화입니다.  
 
만약 우리도 샤워를 하고 있을 때 유리창에 “나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라고 써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얼마나 놀라게 될까요?
우리의 모든 죄는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영화 ‘트루먼 쇼’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영화의 주인공이 태어날 때부터 TV를 통해 지켜보고 있다는 설정을 했습니다. 
이 사실을 주인공만 모르는 것입니다.  
 
주인공이 이것을 알았을 때는 이전과 같은 삶은 살 수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유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누군가의 시선에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화 ‘블랙 스완’에서 주인공이 혼자 부끄러운 행위를 하고 있는 꿈을 꾸다가 눈을 떠보니 무서운 엄마가 지켜보고 있어서 깜짝 놀라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그것도 꿈이었습니다.  
 
그러자 조금은 안심을 합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는 이런 공포를 하나씩 쌓아가는 것입니다. 
 
‘누군가 알면 어떡하지?’ 
 
다 압니다. 
하늘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압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시선에 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하느님의 시선이 아닌 뱀의 시선에 지배받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하와는 뱀에게 보이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하느님께서 지켜보고 계셨음을 알고 그분의 시선을 의식했다면 그런 행위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죄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죄를 이기는 힘은 죄를 짓지 말아야한다는 지식이 아닙니다. 
그런 율법보다 더 위의 법이 그 율법을 주신 분께서 함께 하신다는 ‘현존의식(現存意識)’입니다. 
율법보다 하느님 현존이 우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자신들은 단식을 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은 좋은 것입니다. 
좋은 법입니다. 
그러나 법이 현존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그 법을 정해주신 분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법조항을 모조리 알고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법관만큼 법을 아는 사람이 없겠지만,
법관이라고 해서 가장 법을 잘 지키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규정들은 이미 우리 안에 있고 그 법을 정하신 분이 함께 계심만 안다면 내가 하는 행위로 타인을 심판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법을 가장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주님께서 항상 보고 계심을 잊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언제 우리가 주님의 현존을 잊게 될까요? 
주님의 현존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당에 앉아있어도 딴 생각을 하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존재를 믿고 나와 함께 계심을 알고 그분에게 나의 시선을 보내고 그분의 시선을 느끼고 말 한마디를 건넬 때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때 우리는 그분의 시선에 빨려 들어가 그분이 계신 하늘에 살게 됩니다.
기도는 나 자신을 하늘로 높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와처럼 땅을 기어 다니는 뱀과 대화하게 될 때면 하느님의 시선을 잊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하늘과 멀어지게 됩니다.  
 
뱀과 대화하는 것을 ‘생각’이라 합니다. 
과거의 것을 많이 생각하면 우울증이 걸리고 미래의 것을 많이 생각하면 불안증에 걸립니다.  
 
생각을 할 때 누구나 자아의 지배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생각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늘을 보고 하느님과 대화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의 현존보다 큰 법은 없습니다. 
모든 행동이 누군가 지켜보고 있기에 하는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자아라고 하는 내 악한 본성에게 인정받기 위해 행동하지 않고 주님의 현존을 믿으면 자아의 종살이에서 벗어납니다.  
 
자아의 시선에 사로잡혀 살면서 주님의 법을 따르겠다고 하는 것은 헌 옷에 새 천 조각을 대는 격이고, 헌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는 격입니다.  
 
우리의 새로운 법은 이제 율법 자체가 아니라 주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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