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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2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12-27 조회수 : 369

12월 27일 [성 요한 사도 축일] 
 
복음 : 요한 20,2-8 
 
< 자제력은 믿음의 결과다 >

세상에서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뽑으라면 대부분의 책들에서 소개하는 그 하나 바로 ‘자제력’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방탕하게 살 것 같지만 실제로 매우 절제된 생활을 합니다.  
 
빌 게이츠는 아내의 설거지를 도와주다가 주부습진에 걸렸고, 워렌 버핏의 집무실엔 TV나 컴퓨터 등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소비할 어떤 것도 없습니다.  
 
물론 유재석 씨도 술, 담배도 하지 않고 러닝머신 뛰는 게 유일한 취미인 것을 보면,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이 성공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대표적인 실험이 ‘마시멜로우’ 실험인데, 마시멜로우를 먹지 않고 15분을 버틴 아이들이 성장해서도 안정되고 건강한 생활을 한다는 결과였습니다.  
 
자제력은 만족지연능력이라고도 하는데 감정적 만족을 지연시킬 수 있는 능력이 큰 성과를 내게 만든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감정을 제어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이성’입니다. 
그러면 이성적 사고 능력을 기르면 자제력이 향상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학교나 대부분의 부모들이 생각 좀 하고 살라고 하는데 생각을 하면할수록 자제력은 줄어듭니다.  
 
생각은 자제력을 키우는데 생각이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참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떤 실험에서 대학생들에게 한 팀은 초콜릿을 맛보게 하였고 다른 팀은 무를 먹게 하였습니다.  
 
다음날 전화를 걸어 학생들이 그 맛을 어떻게 기억하는지를 조사하는 실험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자제력의 한계를 측정하기 위한 하나의 속임수였습니다. 
무를 먹은 학생들이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제력을 발휘하여 무만 먹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를 풀라고 하였을 때, 초콜릿을 먹은 학생들은 매우 오랜 시간 포기하지 않았지만 무를 먹은 학생들은 금방 포기해버렸습니다.  
 
무를 먹을 때부터 이미 자제력이 바닥이 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초콜릿을 먹는데 자신들은 줄을 잘못서서 맛없는 무를 먹게 되었다는 생각이 그들의 에너지를 소진시킨 것입니다.  
 
자제력은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닙니다. 
개가 두 발로 걷는 것은 매우 큰 자제력이 필요하여 금방 지치지만 인간은 두 발로 걷는 것에 지치지 않습니다. 
자제력은 이성적 노력으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제력을 감소시키는 장본인이 바로 ‘이성’임을 알아야합니다.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에 에너지가 소진되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루에 무엇을 먹을까를 보통 4시간 정도 고민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에너지를 다 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을 할 때 능률이 저하되고 참을성이 없어지기 때문에 대인관계에 실패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음악을 틀어놓고 유리 닦는 작업을 한다고 하여 참다 참다 그 줄을 끊어버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화가 나게 만드는 그 생각을 끊어버렸어야 했습니다. 
 
‘왜 똑똑한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을까?’라는 책의 마지막은 ‘이성 중독’을 다룹니다.
대학생들에게 실험으로 포스터 다섯 장 중 하나를 가져가서 집에 붙여놓도록 하였습니다.
한 그룹은 곰곰이 생각하고 가져가라고 하고, 다른 그룹은 그냥 좋다고 느껴지는 것을 가져가라 했습니다.  
 
물론 생각을 곰곰이 한 그룹과 직관을 이용한 그룹과는 그 결과가 달랐습니다. 
일주일 뒤에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했을 때 곰곰이 생각한 학생들은 자신들의 선택에 후회를 하고 있었고 별 생각 없이 선택한 사람들은 그 선택에 더 많이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과일잼이나 대학 강의에 대한 선택에서도 같은 결과를 냈습니다.
어쩌면 연애결혼보다 중매결혼이 몇 년 뒤의 만족감이 더 큰 것도 이와 같은 영향일 것입니다.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큰 적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가장 위해준다고 믿는 자신의 이성적 사고입니다.  
 
통일교에서는 옛날에 교주가 결혼할 사람들을 일일이 그냥 무작위로 찍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그들의 이혼율이 낮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선택한 짝이 아니라 그 짝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 요한이 빈 무덤에 도달했을 때의 행동은 우리에게 큰 감동과 깨우침을 줍니다. 
그는 베드로 사도보다 젊었기에 아무래도 무덤에 먼저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사도단의 수장으로 임명하였기 때문에 베드로를 기다렸다가 그 다음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고 그분의 가르침까지 묻어버리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의 삶의 자세가 이렇게 나옵니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이는 그리스도께 대한 첫 믿음을 가질 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자,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와서 보아라.”고 말씀하셨고,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묵고 그분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요한의 자제력은 자신이 사도단의 수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고려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서 온 것입니다.
   
믿음이 존재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아기가 부모를 믿으면 자신이 인간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그때부터 두 발로 걸으려고 노력합니다. 
수천 번을 넘어져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사랑으로부터 오는 믿음이 계속 힘을 공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단 두 발로 걷는 것에 성공하면 그 다음부터는 네 발로 걷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두 발로 걷는 것이 훨씬 수월함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이후부터는 자제력을 발휘할 필요가 없습니다. 
힘들이지 않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자제력을 키우고 그 자제력이 세상에서 성공하면서도 행복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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