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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25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12-25 조회수 : 562

12월 25일 [성탄 대축일] 
 
복음 : 요한 1,1-18 
 
당신은 나만큼 소중합니다 

생각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는 김새해 작가의 유튜브 영상에서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한 아버지와 아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낚싯대가 물에 떠내려가자 아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낚싯대를 잃지 않으려 물에 뛰어들었습니다. 
아버지도 아들을 구하기 위해 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익사했고, 아들은 다행히 어떤 이에게 구조되었습니다. 
 
아들의 운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대로 흘러갔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존재가치가 그렇게 평가절하되어 정해져버렸고 그는 자신이 정한 운명에 맞춰 살았습니다.  
 
술과 싸움과 방탕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고 결혼도 실패하였고 되는 일도 없었습니다. 
두 번째 결혼도 파경에 이를 무렵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은 내가 이렇게 살라고 그런 것은 아닐 텐데!’ 
아버지는 그에게 죄책감을 주시기 위해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목숨보다 소중하기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만큼 가치 있는 사람임을 믿으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죄책감을 심어주시고 우리가 보잘 것 없는 사람임을 알려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이라 믿든 우리가 그보다 더 존귀한 존재임을 일깨워주러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믿어야만 그렇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서 죄책감으로 계속 우리 자신을 세상 속으로 구겨 넣기도 하고 천사처럼 하늘로 오르기도 합니다.
천사가 되려면 하늘로 오를 수 있음을 믿어야합니다. 
그런 존재임을 인정해야합니다. 
 
우리를 감옥에 가두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아는 우리가 죄를 짓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죄책감도 심어줍니다.
자아는 내 안의 또 다른 심판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우리 자신을 평가절하합니다. 
자아는 우리 죄책감으로 인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냅니다. 
자아는 그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남을 판단하게 하던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여 외로워지게 만들고, 또 그렇게 평가 절하된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면 돈과 명예 등에 집착하게 만듭니다.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쾌락에 빠져 모두 잊고 살게 만듭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더 큰 자괴감뿐입니다.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마약왕’도 결국엔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죄책감에 짓눌려 자신이 믿는 바대로 인생이 망가지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그에게 “당신은 당신이 믿는 것보다 더 나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해줄 때, 그의 삶은 변화되게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자신을 평가절하 하는 목소리와 싸워야합니다. 
부정적인 생각과 싸워야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이미 자신을 부정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품고 있는 구유나 마구간이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구유나 마구간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평가절하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 안에 천상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우리를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 하나 주러 오신 것입니다. 
 
세상 몇 위 안에 드는 부자들을 보며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이 타고나서 그렇다고 믿지만 연구 결과는 그렇지 않습니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는 세상에서 가장 성공했다고 한 사람들만을 연구한 결과를 쓴 책입니다.  
 
그는 먼저 유명 하키 선수들이 거의 대부분 6월 이전 출생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발견해냅니다.
타고난 실력으로 유명 운동선수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참 성장기에 있을 때 특별한 재능을 보이는 아이들에게 더 특별한 훈련을 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정상인데 그들은 빨리 태어났고 몸집이 조금 크다는 이유로 그런 훈련을 받을 기회를 더 제공받았던 것뿐인 것입니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처럼 큰 업적과 돈을 번 사람들도 천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컴퓨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보다 어려서부터 컴퓨터를 접할 시간이 많은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란 결론입니다.  
 
천재로 태어나도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할 수도 있고, 보통으로 태어나도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될 것을 믿기만 하면 말입니다.  
 
모차르트도 처음 10년 동안 작곡한 곡들은 거의 평균 이하의 것들뿐이었다는 것도 천재도 노력으로 탄생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될 수 있음을 믿었고, 하늘은 그 믿음에 운으로 보답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 운 때문에 더 노력하게 되어 자신들이 믿는 바대로 된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운도 따르지 않습니다. 
믿으면 될 때까지 하고 그런 사람에게 운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저 ‘경기가 안 좋아서 사업이 안 된다, 나는 흙수저니까!’ 
등으로 자기합리화를 하며 변할 수 있는 자신을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믿으면 안 됩니다. 
우리 안에 모셔져 있는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예수님을 보며 내가 하늘의 임금을 모실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아, 나는 내가 믿고 있었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구나!’ 
 
어떤 아이든 그렇게 될 수 있다고만 믿고 10년 동안 열심히 노력한다면 김연아와 같은 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김연아는 훌륭하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할 수 없는 노력을 할 수 있었던 것뿐입니다. 
 
반드시 그럴 수 있고 그런 존재라는 것을 부모가 먼저 믿어주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못하느냐고 꾸중을 하면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어리석은 부모입니다.
예수님은 짐승들의 먹이통으로 사용되는 구유가 바로 그런 존재라는 믿음을 주러 오신 것이고, 실제로 그 구유는 금으로 쌓여 최초이자 성모님께 봉헌된 가장 큰 성당인 로마의 쌍타 마리아 마죠레 성당 제대 밑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짐승의 먹이통이 성전의 가장 중요한 곳에 모셔지게 된 이유는 그럴 수 있는 가치를 그리스도를 통해 증명해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품은 사람들로써 보통 인간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수많은 구유가 있었지만 예수님을 올렸던 구유만이 지금 대성당의 가장 중심에 모셔져있습니다. 
그만큼 믿으면 그 믿는 것이 실현될 수 있는 운이 따르고 그렇게 되면 성공도 하고 명예도 얻고 하느님 자녀도 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지금 우리 안에서 외치고 계십니다. 
 
“너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사람은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당신은 나를 만날 정도의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 음란한 마음으로 이성을 만난다면 이성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심하게 말하면 고깃덩이처럼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존재 자체가 내가 만나는 상대를 높여줄 수도 낮출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돈을 좋아하면 자녀를 그 돈에 온 인생을 걸어야하는 그런 하찮은 존재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먼저 자신의 자존감을 높여야합니다. 
내가 하느님을 모신 사람임을 믿어야합니다.
하느님이 그 구유를 만나줘야 구유가 자신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습니다.  
 
말로 누군가의 자존감을 높여줄 수는 없습니다.
말이 아니라 상대를 만나고 있는 나의 존재가 이미 상대에 대한 칭찬이 되기도 하고 꾸지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먼저 거룩해지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며 다가오십니다. 
 
“너는 나를 만나기에 합당한 존재야!” 
 
하느님을 만나야 하느님이 됩니다. 
내가 하느님이 되어야 누군가
하느님을 만나야 하느님이 됩니다. 
내가 하느님이 되어야 누군가를 그만큼 높여줄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이 오늘 우리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비천한 마구간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너는 그런 존재가 아니야, 너는 나를 만나기에 합당한 존재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야 남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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