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3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복음 : 마태오 11,11-15
< 행복의 수준 차이 >
한눈에 띄는 외모, 풍기는 자신감! 모델이자 영화배우, 달리기 선수이기도 한 에이미 멀린스(Aimee Mullins)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화려함 뒤엔 남다른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육상선수임에도 두 다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선천적 기형으로 태어난 그녀에게 의사가 말하길 “이 아이는 절대 걷지도, 운동도 못 하며 타인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살지 못할 것입니다.” 이 사형선고와 같은 말과 함께 에이미의 두 다리는 절단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의족으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미국대학스포츠연맹 주체 “비장애인” 육상대회에 출전해 1996년 세계신기록을 수립한 것입니다.
그리고 피플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에 뽑혔습니다.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장애와 역경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까?” 라고 물을 때, 그녀는 “장애와 역경이요? 그것은 피하거나 넘어서야 하는 장애물이 아닙니다.
그 자체로 나의 자아를 깨우고 능력을 북돋는 신의 선물이죠!”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합니다.
“제 생각에 진짜 장애물은 억눌린 마음입니다.
그렇게 희망도 없이 눌려있는 마음 말이죠.”
[출처: 에이미 멀린스, 마이 드림 스토리, 유튜브]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서 장애 때문에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장애가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장애가 있었기에 사람들의 시선을 더 끌 수도 있었고, 자신의 말이 더 진실성 있게 전달될 수 있었으며, 작은 도전도 더 큰 성취로 다가올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당당함은 두 발을 멀쩡히 지니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을 넘어섭니다.
모든 정상적인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어도 억눌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지만 그녀는 그것보다 못한 상황에서도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에 그만큼 자존감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배부른 돼지가 더 행복할까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 행복할까요?
종교에서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선택하라고 가르치지만 사회에서는 아무래도 배부른 돼지가 되는 게 더 나을 것도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일단 돈이 없어 배를 곯는다면 행복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배부른 돼지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라고 하시며, 세례자 요한이 모든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는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가장 행복하지 않을 때도 보통 사람들의 행복수준을 넘어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큰 사람은 그만큼 행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가장 작은 사람은 지옥에서 가장 큰 고통을 누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란 하늘나라에서 가장 덜 행복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에 오른 사람 중에 가장 덜 행복한 사람도 세례자 요한보다는 행복하다는 말씀이십니다.
이 말씀은 배부른 돼지보다는 아무래도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배부른 돼지는 배만 부르면 더 이상의 행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다 얻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 입장에서는 행복이 꼭 먹는 것만이 다가 아님을 알기에 돼지처럼 배만 채우려는 인간을 불쌍하게 바라볼 것입니다.
물론 돼지도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비웃을 것입니다.
이렇게 바리사이들이 가난해야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정말 가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웃고 그 가르침도 조롱하였습니다.
하지만 분명 행복은 각기 다른 수준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합니다.
보통사람은 에이미 멀린스나 닉 부이치치 같은 이들이 말하는 행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행복할 조건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몸이 온전해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수준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행복의 수준을 넘어선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느끼는 행복은 먹고 마시는 그런 행복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수준에 오른 자존감에서 오는 행복감입니다.
이런 의미로 하늘나라의 수준에 있는 사람이 비록 배고픈 소크라테스처럼 덜 행복하더라도 아직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자녀 수준에 오르지 못한 세례자 요한보다는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 길에 들어섰기에 세상 모든 사람들보다는 세례자 요한이 더 행복합니다.
하느님 자녀가 되면 이 세상 누구도 부러워하지 못할 행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먼저 내가 어떤 수준의 행복을 추구해야하는 사람인지, 즉 돼지인지 소크라테스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인지 하느님의 자녀인지를 먼저 정해야 어떻게 행복을 채울지가 결정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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