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9일 [대림 제2주일]
복음 : 루카 3,1-6
< “그래서, 뭐가 되고 싶으십니까?” >
저는 어머니의 강요로 성당에 다니기 시작하였고 첫 영성체 이후로는 주일미사에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집은 평택 시골이었는데 학교는 자전거를 타고 나와서 송탄에서 다시 봉고차를 갈아타서 수원으로 다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3은 주일도 학교에 등교해야 했고 6시 이전에는 집에 갈 수 없었습니다.
끝나고 아무리 빨리 나와도 성당에 도착하면 미사가 끝날 때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주 정도 빠졌을 때 판공성사표가 나왔습니다.
역시 어머니의 강요로 고해성사를 보아야했습니다.
신부님은 무섭기로 소문난 분이셨습니다.
주일 두 주를 학교에서 허락하지 않아 빠졌다고 하니까 대뜸 “그래서 뭐가 되려고 하는데?”라고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나올 수 없는 상태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빠진 건데 너무 억울하여 “학교에서 안 보내주는데 어떡합니까?”라고 따졌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계속 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자율학습을 하다가 5시쯤 가방을 창문 밖으로 던져놓고 매주 탈출을 감행하였습니다.
1년 동안 한 번도 걸리지 않았고 그렇게 주일미사를 계속 빠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뭐가 되려고?”라는 질문에 “훌륭한 사람이 돼야죠!”라고 속으로 대답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질문은 그런 뜻의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질문은 한 대답을 제외하고는 뭐라 대답해도 다 틀리게 돼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한 번 대답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 살고 있는지, 그리고 내 자녀는 어떤 사람이 되게 하고 싶은지.
9.11 테러 때 무역센터에 차례로 여객기가 부딪혀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습니다.
쌍둥이 빌딩이었기 때문에 처음 한 건물에 비행기가 부딪혔을 때 다른 쪽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은 밖으로 나올 시간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테러가 일어난 건물은 다른 쪽이기 때문에 이 건물에 있는 사람들은 동요하지 말고 하던 일을 계속 하라고 건물 스피커의 안내가 나왔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일을 잊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사람들은 건물 안에서 일을 해야 할 것인지, 긴급 뉴스를 봐야 할 것인지, 밖을 내다봐야 할 것인지 우왕좌왕 하였습니다.
그런데 몇몇은 그 방송을 아예 무시하고 건물 밖으로 나와 버렸습니다.
결국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 방송을 무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아이들에게 “뭐가 되고 싶어?”라고 물으면, “연예인이요.”, “과학자요.”, “소방관이요.”, “수녀님이요.”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그런 질문 자체가 아이들을 이 세상 속에 갇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무엇이라고 대답하든 이 세상 속에 갇혀 이 세상과 함께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결국 멸망해버릴 이 세상에서 무엇이 된다고 한들 구원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되라고 말씀하고 싶으셨을까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자녀, 즉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입니다.
이 세상에서 되려고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람이라 믿으면 구원에서 제외됩니다.
아이가 늑대라고 믿으면 늑대로밖에 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라 믿어야 사람이 사는 곳에서 함께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연예인이 되고 의사가 되고 정치인이 되고 판검사가 되라고 창조하셨을까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라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만 하면 무엇으로 살든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되고 싶은 것들이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이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구원의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구원자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기 위해 광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이가 ‘세례자 요한!’ 인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입니다.
요한은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가진 것을 나누며 마치 이 세상에는 어떠한 욕구도 두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그 세상 속에서 무언가 되려고 노력하겠지만, 광야에서는 그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 외에는 어떤 욕망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마치 어린이처럼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이 세상에서는 그저 하느님의 뜻대로만 살아가면 그만인 삶이 광야에서 추구할 수 있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부자가 돼라, 성공해라, 유명해져라 등의 세상에서 무언가 되도록 가르친다면 이는 마치 허물어질 건물에 더 오래 머무르게 만드는 꼴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무언가가 되려고 한다면 갑자기 무너져 내릴 이 세상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결승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와의 대결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지단이 먼저 한 골을 넣었고, 그 다음 이탈리아의 마테라치가 동점 골을 넣었습니다.
연장전에 돌입하여 지단과 마테라치가 몸싸움을 벌인 후 말싸움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지단이 갑자기 머리로 마테라치의 명치를 들이받았습니다.
지단은 생의 마지막 A 매치를 퇴장으로 마무리했고 승부차기 끝에 우승컵 역시 이탈리아에게 넘어갔습니다.
마테라치가 한 말은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출신 이민자 2세였던 지단과 그의 누나에 대한 인종차별적 폭언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런 인종차별적 모욕을 한 마테라치가 잘못이지만 그래도 지단은 프랑스를 대표해 월드컵 결승전을 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순간은 알제리 출신이 되어버려 경기에 큰 지장을 주게 된 것입니다.
물론 출신 성분을 잊을 수야 없겠지만 한 국가를 대표하고 있다면 이제 과거에 속해 있던 어떤 것들이 자신에게 더 이상 영향을 주지 말게 했어야합니다.
우리가 광야로 나와야 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언가 되려고 하는 동시에 하느님 자녀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가는 어떤 순간에 자신이 실제로는 하늘나라가 아닌 세상에 속해있는 사람임이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이 세상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입고 먹는 것 걱정하지 말고 오늘만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로 가려면 광야를 건너야합니다.
바라본다고 건널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이 세상에서 되고 싶은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비로소 하늘에 속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이 길을 마련하기 위해 파견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 길을 만드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역할입니다.
사람들을 세속에 속하게 하는 것으로부터 구해내야 합니다.
교회는 마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처럼 사람들이 이 세상의 무엇이 되려고 하는 것을 멈추게 하여 그들의 시선이 자신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는 예수님만을 바라보게 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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