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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12-02 조회수 : 420

12월 2일 [대림 제1주일] 
 
복음 : 루카 21,25-28. 34-36

< 그분의 오심이 곧 나의 종말 > 

돈키호테는 기사에 관한 영웅소설을 하도 많은 읽어서 자신이 돈키호테라는 이름을 지닌 기사라고 믿어버린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은 시골 주막 처녀를 공주로 여기고 그녀를 위해 악의 무리를 무찌르겠다고 풍차와 싸웁니다. 
그리고 자신을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진실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거울의 기사입니다. 
거울은 자신을 보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기사라는 것은 없고 그런 제도도 3백 년 전에나 있었던 것이라는 진실을 아는 것은 돈키호테에게 죽음과 같은 고통입니다.  
 
그래서 거울의 기사와 싸웁니다. 
하지만 결국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자 돈키호테는 정말 침대에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됩니다. 
빛이 오면 어둠은 종말을 맞고, 진실이 오면 거짓은 죽습니다.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시작인 대림 1주일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한 시기이지만 복음말씀은 세상 종말에 대해 설명합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세상은 그 닥쳐오는 예감 때문에 두려움에 까무러칠 것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방탕과 만취와 세상 근심으로 무뎌지지 않게 하라고 충고합니다. 
깨어 있으며 그분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 종말을 맞는 이들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우리 각자도 종말의 두려움을 넘어서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내가 믿고 있었던 모든 것이 허물어질 때 비로소 진리를 만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 모두가 믿고 있었던 것들은 거짓이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진리가 오시는데 이미 세상에 진리가 있었다면 그분은 굳이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분은 진리로 오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고 있었던 모든 것은 거짓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고 있었던 것이 거짓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까요?
그리고 그 고통을 감수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를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성(城)’은 진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계속 만나야 할 분을 만나지 못하고 헤매는 한 주인공을 소개합니다. 
 
K는 측량기사입니다. 
그리고 한 성주인 백작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성으로 향합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K는 밤늦은 시각에 도착했다. 마을은 깊이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성이 있는 산은 안개와 어둠에 둘러싸여 있어서 전혀 보이지 않았고, 커다란 성이 있음을 알려주는 아주 희미한 불빛조차도 눈에 띄지 않았다.

K는 국도에서 마을로 통하는 나무다리 위에 서서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허공 속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가 숙소를 찾아 여관으로 들어가는데 성의 집사 아들이라는 사람에게 이상한 얘기를 듣습니다.
“이 마을은 성의 영지입니다. 
여기서 살거나 묵는 사람은 말하자면 성안에서 살거나 숙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말은 측량기사로서의 자존심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성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이미 성 안에 들어와 있다니.’ 
 
분명 이들이 착각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사실 측량기사 K는 안개와 어둠 때문에 자신이 성문을 통과한 것을 모를 뿐이지 실제로 성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음날 K는 백작을 만나기 위해 성을 찾아 떠납니다. 
 
“그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지만, 길은 길게 뻗어 있었다. 
도로, 즉 마을의 큰길은 성이 잇는 산으로 나 있지 않았다. 
성이 있는 산에 가까이 다가가는 듯하다가, 마치 일부러 그런 듯 구부러져버렸다. 
성에서 멀어지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K는 이 길이 결국에는 성으로 접어들 거라는 기대를 계속 버리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기대나 예상이 무너지는 것을 참아내지 못합니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믿음과 선택이 틀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을 자괴감으로 빠뜨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 교만함이 참으로 자신을 자괴감으로 빠뜨리는 것입니다. 
K는 결국 그 성에 정착하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죽게 되었을 때 성에 머물 수 있는 허락이 떨어집니다.

진리 앞에서 우리도 죽어야합니다. 
내가 믿던 것이 아니라 내가 믿던 것과 반대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 죽음을 거부한다면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어떤 모르는 분과 우연히 대화를 조금 나누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제라고 하니까, 천주교는 마리아를 믿는 종교가 아니냐고 조심스레 말합니다. 
이전에 개신교 신자였던 것입니다. 
저는 아니라고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그것은 받아들이는 눈치였습니다. 
 
이어 마음이 조금 열렸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그래도 자신의 아내는 외도를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친구와 오랜 시간 외도를 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둘은 태연하게 자신을 대하고 있었고 이에 분노가 타올라 살인까지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혼하여 살며 자녀가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쉽지 않겠지만 그것은 실수이고 하실 수 있으면 자녀를 위해서라도 용서를 하려고 노력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하고 싶었고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이 먼저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었다고 하며 그런 말을 한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려던 말을 접고 고개를 끄덕여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아이는 홀어머니 밑에서 커야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온전한 모습으로 성장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어쩌면 그 아이도 결혼해서 이런 과정을 또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혼하여 사는 것이 당연하고 그 분노를 삭이게 만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원수까지도 용서해야 한다는 말은 그 사람에게 해 줄 수 없었습니다.  
 
진리는 자신이 믿는 것이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겸손함이 스며들 때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종말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종말을 주시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심판관으로 오실 때도 그러하겠지만 우리가 개인적으로 주님을 만날 때도 이런 자기 허물어짐의 경험을 꼭 겪게 됩니다.

배추는 다섯 번을 죽어야(밭에서 뽑힐 때, 칼로 쪼갤 때, 소금에 절일 때, 고추와 젓갈로 버무릴 때, 장독에서 발효될 때) 맛난 김치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도 어쩌면 배추가 받아들이길 원치 않는 진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만나면 자신은 죽지만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행복인지 알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고통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참 진리는 나를 죽이게 만듭니다. 
내가 믿는 돈, 쾌락, 교만을 죽이게 만듭니다. 
그것들에 믿음을 계속 둘 때 아기 예수님으로 태어나셔서 가난하고, 겸손하고, 
정결하게 구유 위에 양식이 되기 위해 놓이신 예수님을 만나기는 불가능합니다.  
 
내가 믿고 쌓던 행복의 성을 모두 허물어야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하느님의 성 안에 이미 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분은 나를 죽이러 오십니다. 
내가 믿는 행복을 죽이러 오시는 것입니다.  
 
나를 죽여주시는 것이 그분이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라는 거짓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오시는 날이 나의 종말입니다. 
내가 종말을 맞지 않았으면 아직 그분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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