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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2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11-26 조회수 : 406

11월 26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복음 : 루카 21,1-4

< 마음이 가난해야 행복할 수 있는 이유 > 

1976년은 중국 전체가 먹을 것이 없어서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중국 당산시에는 인구 70만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 지진이 일어나 23초 만에 24만2천 명이 죽었습니다. 
가히 저주라 할 만한 대재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었던 일본대사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을 했습니다. 
그 참사 속에서도 남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이 없었고 남을 해치는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위기에 처한 이웃의 생명과 재물을 구하러 서로 불 속에 뛰어들었으며 자신이 먹기에도 부족한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더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강제된 행위가 아니라 자유의사에 의한 행위였다는 데서 외국인 목격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같은 해 세계 최고의 부를 자랑하는 미국 뉴욕시에서 12시간의 정전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신문, 방송에서는 그 상태를 ‘연옥’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전등이 꺼져서 자신의 얼굴이 타인에 의해서 식별되지 않게 되었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들은 남의 재산을 파괴하고 약탈하고 방화하고 강간을 하고 서로 찌르고 죽였습니다. 
불만 들어오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도시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입니다.

자칫 부자들이 돈이 많으니 그것으로 만족하고 정전사고 동안에 서로를 위해줄 수 있었을 것이고, 가난한 이들이기 때문에 그 기회를 통해 부자가 되려고 했을 것이라는 잘못된 추측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돈은 가지면 가질수록 욕심이 줄어들기보다는 더 큰 목표가 생기기에 욕심이 더 커집니다. 
꼭 다 들어맞는 것은 아닐지라도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보다 욕심이 더 많다고 보아야합니다.  
 
욕심은 마치 지옥의 아귀처럼 목구멍이 작아서 아무리 먹어도 항상 배고픈 괴물과 같습니다.
저는 부자 본당 신부님이 허탈하게 말하는 그 본당의 교무금 평균 액수를 듣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수천만 원, 수억 원에 가까운 성물을 기부하라고 하면 열 명 이상이 지원을 하지만 정작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교무금은 시골본당보다 낮은 수준으로 책정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제가 본당신부를 할 때 본 어르신들은 나라에서 10만원 20만원 지원받아 살지만 그 중 반이나 사분의 일을 교무금으로 내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좀 줄이라고 해도 그분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러면서 ‘왜 가난하면 욕심이 줄어들까?’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가난하면 미래의 계획을 세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내는 액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금방 회복될 수 있습니다. 
지금 처지나 가진 것의 반을 내는 처지나 크게 다를 게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과부도 생활비 전부를 봉헌했지만 렙톤 두 닢은 현재 돈으로 천 원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금방 회복될 수 있는 액수인 것입니다.  
 
하지만 백억 부자가 가진 전부를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만큼 그 가진 것만으로 누리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백만 원 버는 사람이 십일 조 내는 것은 쉬워도 천만 원 버는 사람이 십일 조 내기는 어렵습니다. 
이런저런 것을 생각할 때 확실히 더 가질수록 욕심이 더 커지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고통은 욕심과 비례합니다. 
욕심은 두려움을 수반합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될 두려움, 얻은 것을 잃을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두려움은 고통입니다. 
가져도 고통스럽고, 갖지 않아도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명예가 추락하면 자살하고, 명예가 생겨도 자살할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을 빼앗겨서 고통스럽고 또 가진 것을 잃을 까봐 두려워서 그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려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악은 돈에 대한 욕심에서 나온다고 가르치고, 불교에서는 모든 고통은 욕망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다 같은 말입니다.

잃어봐야 별거 없는 그런 가난한 삶, 그 삶이 욕심을 줄여주기 때문에 쓸데없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를 보시며 칭찬해주시는 이유는 바로 그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삶의 자세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부자이면서 액수만 많게 낸다고 훌륭한 봉헌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이 세상의 욕심을 채우는 것에 두지 말고 하느님께 예쁨을 받는 것에 두라는 것입니다.
     
욕심이 있으면 하느님을 원하지 않고 하느님이 주시는 것을 원하게 됩니다. 
이것은 남편을 사랑하지 않고 남편이 벌어오는 돈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이 가난해야 하느님 나라를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세상과 하느님의 두가지 욕심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가난은 이 세상에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최소한으로 줄여 세상 것이 아니라 주님만을 원하는 상태입니다. 
주님은 그런 마음의 가난이 봉헌으로 증명되고 훈련되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명령하시듯 주님은 당신이 주시는 재물이나 명예가 아니라 바로 당신만을 원하시는지를 봉헌을 통해 증명해주기를 원하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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