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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1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11-14 조회수 : 391

11월 14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복음 : 루카17,11-19

< 부모를 공경하라​! >
 
어떤 부부에게 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내가 다른 사람에게 비밀스럽게 속삭이는 이야기를 남편이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이야기인즉 두 아들 중 한 아이가 남편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아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후 몇 년이 흘렀습니다.  
 
그는 나이가 들어 중병에 걸렸고 자기가 곧 죽을 것을 짐작하고 유서를 썼습니다.
“내 핏줄을 타고난 아들에게 전 재산을 준다.”
     
그가 죽자 그 유서는 재판관에게 넘어갔습니다.
재판관은 두 아들 중 누가 진짜 아들인지 가려내야 했습니다. 
재판관은 두 아들을 아버지의 무덤 앞으로 불러 몽둥이를 하나씩 주며 말했습니다. 
 
“자, 무덤을 힘껏 쳐라. 힘껏 친 사람에게 전 유산을 넘겨주겠다.”
그러자 한 아들이 울면서 말했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재판관은 차마 몽둥이로 내리치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아들에게 모든 재산을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처럼 부모를 공경하면 자녀이고 그렇지 못하면 아직 온전한 자녀가 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많은 재산을 물려주어서? 공부를 가르쳐주어서? 아닐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는 ‘나를 지금의 나로 살게 해 주어서’입니다. 
만약 부모가 나를 낳아놓고 기르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운이 좋아서 짐승들에게 키워졌다 하더라도 나는 짐승밖에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모는 나를 살게 해 준 것 하나로 공경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부모를 원망하고 부모의 마음을 일부러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해 준 것이 뭐가 있냐는 것입니다.
일단 숨을 쉬고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또 두 발로 설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부모 덕분입니다.
그냥 인간으로 이 사회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부모덕입니다. 
부모는 그 존재만으로 우리 각자에게 큰 은혜를 주었습니다.

저는 재난영화를 좋아합니다. 
별 스토리도 없이 그저 터널에 갇혔다가 고생고생 끝에 살아나거나, 큰 지진이나 화재 속에 갇혀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다는 내용입니다. 
보고 있을 때는 손에 땀을 쥐게 할 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결말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입니다.
     
‘일상’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일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공기도 필요하고 적당한 온도도 필요하고 중병도 없어야합니다.  
 
일상은 그냥 일상이 아닙니다. 
그것 자체가 은총입니다.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닌데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재난입니다. 
그것을 잃어보아야 내 눈과 손가락과 이 공기가 얼마나 귀중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일상을 살게 해 준 공기와 같은 분들이 부모님입니다. 
그런 부모님에게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은 일상을 살도록 나에게 제공되는 것들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믿는 교만함과 같습니다.

그런데 인간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해 준 분들이 부모님인 것에 반해, 이런 ‘일상’을 넘어서 만물의 창조주의 자녀로 살게 해 준 분이 하느님입니다.  
 
부모가 사랑으로 우리를 성장시켰다면 하느님도 사랑으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관계 맺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람을 미워해야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까요? 
심지어 용서하고 싶어도 되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의 힘으로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유명한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 1737~1794)은 ‘로마제국의 멸망사’라는 책을 썼습니다. 
수많은 학자와 학생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많은 학자들은 강력하고 완벽했던 로마제국이 어떻게 해서 멸망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 원인을 다각적으로 조사하고 연구하여 발표했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의 멸망원인이 젊은 사람들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로마제국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도 한 원인이고, 외적의 침입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젊은이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의 젊은이들은 대(大)로마제국이라는 자부심과 부와 힘에 도취되어 지나온 역사와 로마제국을 이끌어온 어른들의 지혜와 판단력을 거부했습니다. 
다시 말해 노인들, 어른들의 경력과 지식을 거부하고 멸시했습니다.
     
실질적인 예로 그 당시 로마의 젊은이들은 로마의 원로원, 즉 로마를 이끌어가는 국회의원들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60세 이상의 노인들은 다리 밑으로 떠밀어 버려라’ 하는 구호를 외치고 다녔다고 합니다. 
에드워즈 기번은 이렇게 로마의 젊은이들이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고 부모의 말도 듣지 않고 원로원도 무시한 채 시행착오를 겪다가 결국은 멸망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병 환자들은 바로 우리 자신들을 의미합니다. 
나병환자는 일상을 살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지 못한 이들입니다. 
이들이 치유를 받았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일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나병이 치유된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수 없다면 그것이 진정 치유된 것일까요? 
부모에게 태어나 자라서 부모에게 감사할 수 없다면 아직은 참 인간으로 새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란 계명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와 하느님을 공경해야 하는 이유가 같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면 하느님도 공경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할 때 비로소 부모의 자녀로 자란 것처럼, 일상에 감사하여 하느님께 찬미드릴 수 있을 때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을 감사하며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해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할 때 비로소 오늘 유일하게 주님을 찬미했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로부터 들은 이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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