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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11-07 조회수 : 419

11월 7일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독서 : 필리피 2,12-18
복음 : 루카 14,25-33

< 애정과 사랑의 차이 >
 
요즘 상영하는 ‘완벽한 타인’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큰 스포일러는 없을 것입니다. 
40년 지기 친구 커플들이 한 커플의 집들이에 와서 저녁식사시간 동안 핸드폰으로 오는 모든 문자, 전화 등을 공유한다는 소재의 영화입니다.  
 
서로 잘 알고 지내던 사이의 친구와 커플들이 핸드폰으로 오는 전화와 메시지를 통해 밝혀지는 비밀들로 인해 서로 완벽한 지인이 아니라 완벽한 타인이었음을 알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처음엔 서로에게 비밀이 절대 없다고, 그래서 완벽한 지인들이라고 자부하던 이들은 서로 믿지 못하고 숨기고 뒷말하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자 완벽한 타인들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핸드폰만 몇 시간 공유해도 40년 우정이 쉽게 끊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우리는 얼마나 깊이 알고 있을까요? 
영화는 40년을 함께 살아도 완벽한 타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충격을 줍니다.
     
오랜 시간 함께 살아도 애정의 깊이가 얕을 수 있고 만난 지 얼마 안 돼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만나면서 관계가 깊어지기도 하지만 그 만남을 통해 성장하는 관계는 한계가 있습니다.  
 
함께 가장 오래 만나는 사람들이 부부이고 가족이지만 그렇게 함께 살아도 싸우고 이혼하고 형제간에도 남남처럼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만남의 정도와 관계의 깊이는 비례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누군가가 상대를 통해 성장하는 것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만남은 서로를 변화시키는데 만약 누군가가 변화되기를 원하지 않으면 그 이후로부터는 껍데기 만남이 됩니다. 
 
그런데 변화는 나의 이전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들어옴을 의미합니다. 
새로워지기 위해 이전 것을 포기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인간이 하느님을 만날 때 하느님은 인간을 하느님으로 만들려고 하시기 때문에 인간적인 모든 것을 벗어던져야합니다.  
 
야생마를 준마로 만들려고 하는데 그 야생의 습성을 버리려하지 않는다면 준마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변화되기 이전에 가졌던 본성이 바로 자기 소유인 것입니다. 
내 소유가 비워져야 주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요구하시는 우리의 소유는 참으로 버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바로 ‘애정’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사람이 애정의 힘으로 살아가는 게 보통인데 그 애정을 버리라니 참으로 가혹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실 때는 언제고 또 자기 자신도 미워하고 이웃도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을 따를 수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도저히 합치될 수 없는 모순적인 가르침처럼 들립니다. 
사랑하라면서 미워하라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 안에는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애정은 사랑이 아니라는 암시가 들어있습니다.
애정은 소유의 개념이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만족을 얻는 것이라면, 사랑은 보답을 바라지 않고 아낌없이 내어주는 마음입니다.
애정을 버리지 못하면 사랑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애정에만 집착하면 수십 년을 사귀어도 어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애정을 잃을까봐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애정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애정은 본성에 의해 생겨나는 소유욕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으면 당신을 따를 수 없다고 하시며 또한 가족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을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애정에 사로잡혀 결혼하기 위해 신앙을 포기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애정에 휘둘리지 않고 그 애정을 버리고 주님을 받아들이게 될 때 주님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어머니를 떠나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던 그리스도께서 애정을 버리셨기에 어머니를 완전히 사랑하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으로서 사랑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애정에 사로잡혀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십자가를 거부하셨다면 어머니는 인간으로서의 자식의 애정만으로 만족해야 하셨을 것입니다.  
 
사람이 아닌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싶다면 먼저 인간적 애정을 비우고 그 자리에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우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합니다.  
 
애정은 소유이고 사랑은 비움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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