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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11-02 조회수 : 451

11월 2일 [위령의 날]

< 연옥은 있다 >

시냇가에서 아리따운 처녀가 물을 건너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마침 길을 가던 한말의 대선사 경허 스님과 그를 따르는 젊은 수도승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처녀는 부끄러움을 참으며 젊은 스님에게 도움을 구하자, 젊은 스님은 처녀에게 정색을 하며 화를 내었습니다. 

“우리 불가에서는 여자를 가까이 하면 파계라 하여 내쫓김을 당하는데 어찌 젊은 처자가 그런 요구를 하십니까?”

난처해진 처녀는 노승 경허에게 다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경허는 선뜻 등을 내밀며 “그거 어려울 것 없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경허는 처녀를 등에 업어다 건너편에 내려주고는 계속해서 갈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뒤따라가는 젊은 스님의 마음에는 갈수록 온갖 의심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땡중이 아닐까?”

젊은 스님은 자기의 스승 경허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이를 꾹 참고 십리 길을 더 갔습니다.
그러나 젊은 스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침내 “스님,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수도하는 스님이 어떻게 젊은 여자를 업을 수 있습니까?” 하고 따지며 대들고 말았습니다.

젊은 제자의 화난 목소리를 듣던 경허 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놈아, 나는 벌써 그 처자를 냇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네놈은 아직도 그 처자를 업고 있느냐?”
 
우리는 세례 받을 때나 고해성사 받을 때 죄를 용서받고 깨끗해진 상태에서 살다가 죽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바로 천당 간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내려놓은 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직도 지고 있는 죄가 있습니다. 
과연 죽기 전에 교만이나 성욕, 욕심 등을 완전히 버리고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음탕한 눈으로 여인을 바라만 보아도 간음죄를 짓는 것이라 하십니다. 
바라보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 마음 안에 보이지 않게 도사리고 있는 음탕한 마음이 곧 죄인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내려놓지 못하고 가는 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 때 조류독감이나 신종플루 등의 전염성이 강한 병이 발생했을 때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혹은 외국에서 들어올 때 체온계 등으로 일일이 검사하여 그런 병이 걸린 사람이 들어와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되지 않게 철저히 관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죄는 확실히 전염성이 있습니다. 
만약 어린 아이가 불량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보고 듣는 것들이 좋지 않기 때문에 그 아이가 매우 건전하게 크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이와 같은 의미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는 크다고 합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큰 사람은 없다고 하는데, 하늘나라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이 가지고 있었던 아주 작은 결점조차도 지니고 있으면 들어갈 수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따라서 그렇게 완전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 하느님 나라이기에 연옥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가르칩니다. 
만약 개신교가 말하듯이 믿음이 있으면 천국, 없으면 바로 지옥이라 한다면 부족한 우리 모두는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물론 개신교에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나무더러 명령하여 뽑혀져 바다에 심기라면 그렇게 된다고 하셨는데 어떤 누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어서 산과 사물을 움직일 수 있습니까?
 
따라서 이런 부족함을 지닌 인간들이 우리 모습이기에 연옥이란 곳은 오히려 과거의 모든 양심의 가책과 하늘나라 들어가기에 부족한 모든 부분들을 완벽하게 보완하는 곳이기에 벌 받는 곳이 아니라 은총의 장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세에서뿐만 아니라 내세에서도 용서받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2)

또 구약의 마카베오는 작은 우상을 지니고 다니다 전사한 병사들의 죄사함을 위해 제물을 바칩니다. 
“그들은 숨은 일을 모두 드러내시는 주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 범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유다는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그것을 속죄의 제사를 위한 비용으로 써 달라고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2마카 12,41-45)

진정으로 내세에서 죄를 용서받고 완전히 깨끗해지는 연옥의 단계가 없다면 천국에 바로 들어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로마에 있는 연옥성당에는 연옥에서 고통 받는 영혼들이 잠시 나타나 자신들의 고통이 너무 크다고 기도와 미사를 부탁하며 남겨놓고 간 흔적들이 모아져있습니다. 

불에 탄 손자국 모양의 탁자나 옷, 성경 책 등이 인상적입니다. 

성인들은 연옥의 고통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괴로움을 한데 합친 것보다 연옥의 아주 미소한 괴로움이 더 혹독합니다.”
(성 치릴로) 

“연옥에서 일순간 받는 고통은 석쇠 위에서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의 고통보다 더 무섭습니다.”

“현세에서 받는 모든 괴로움보다 연옥불은 혹독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면 왜 우리는 현세에서 보속하는 것보다 연옥에 가서 보속하는 것이 더 혹독할까요?
연옥에서 바칠 수 ‘없는’ 공로가 있기 때문인데, 바로 ‘믿음’의 공로입니다. 

연옥에선 멀리서나마 하느님을 뵐 수 있기에 그 바치는 보속에 믿음의 공로가 없기에 현세에서 보속하는 것보다 훨씬 더 혹독한 고통으로 정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는 저희 교구 신부님들이 묻혀계신 교구성직자 묘지를 방문해 기도하고 왔습니다.
밑으로 내려오면서 ‘이쯤이 나중에 내가 묻힐 자리가 되겠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묻혀계신 모든 신부님들이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돌아가신 분을 위해 슬퍼한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런 혹독한 고통을 당하시는 분들을 위해 기도해 드리는 것이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에게 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분들은 하느님과 아주 가까이서 당신들을 위해 기도했던 우리들을 위해 기도해 줄 것입니다. 
이것이 성인들과의 통공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이런 말을 하십니다.

“눈물을 줄이고 기도에 힘쓰십시오. 
운다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당신을 떠난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결국 연옥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지상의 교회와 천상의 교회와의 일치를 이룸을 의미하며 나 자신도 연옥벌을 면하기 위해 더 열심한 정화의 삶을 살아가게 만듭니다. 

그래서 교회는 전례력에 위령성월이란 귀중한 시간을 배정한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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