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8일 [연중 제30주일]
제1독서 : 예레미야서 31,7-9
제2독서 : 히브리 5,1-6
복 음 : 마르코 10,46ㄴ-52
< 의견과 믿음의 차이 >
인공지능 시대에 사람들은 빅데이터나 과학을 근거로 내려진 합리적인 판단에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첫 인상이나 통찰, 혹은 직관에 의한 판단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오랜 연구를 통해 내려진 합리적인 사고가 꼭 다 들어맞는 것만은 아닙니다.
진화론과 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그것은 의견이지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한 순간에 믿음이 들어오면 수많은 사람들이 연구해 놓은 것을 뒤집을 수 있는 힘을 갖기도 합니다.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쿠로스 석상이 발견되어 박물관이 구매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 조각상을 잠깐 훑어본 두 명의 전문가가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박물관은 이 두 전문가의 말을 신뢰하지 않고 이 석상의 진위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별도의 팀을 꾸려 14개월간에 걸쳐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박물관의 예상대로 이 유물은 기원전 6세기의 진품으로 판결이 났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말해왔던 전문가들 때문에 계속해서 진품 논란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후 재검증을 거쳤고 결국 1980년대 만들어진 가짜로 밝혀집니다.
오랜 시간을 투자한 분석 작업보다 한 번 훑어본 전문가의 직관이 더 정확했던 것입니다.
14개월의 조사보다 첫 2초의 직관이 더 정확했다는 것입니다.
[참조: ‘블링크’, 말콤 글래드웰]
의견은 쉽게 변할 수 있지만 믿음은 온 세상이 반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의 힘이 아닌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 통찰을 의미합니다.
아이가 부모를 자신의 부모라 여기는 것은 여러 분석에 따른 의견에서가 아니라 순간적인 통찰력을 통해 생긴 믿음 때문입니다.
이 믿음 때문에 두 발로 걷고 말을 할 수 있고 사회생활도 할 수 있도록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그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지 공부로 넣어지는 무엇이 아닙니다.
그리고 합리적 의견이 아닌 믿음만이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그 믿음이 실제로는 의견의 수준밖에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돈 앞에서 약해지고 애정 때문에도 약해집니다.
청년회를 열심히 하다가 개신교 신자를 만나서 개신교 신자가 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까지 성체를 무엇이라 여기고 영했던 것일까요?
개신교에 가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는 지금까지 성체가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사실을 믿었던 것이 아니라 그럴 것이란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쉽게 흔들릴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자신이 오리인지 백조인지 모르면 고통 속에서 오리도 되지 못하고 백조도 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학 나가서 성경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논문 지도 교수와는 물론이요, 성경을 공부하는 모든 이들과 싸워야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성경공부는 필요 없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어도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경공부를 너무 많이 하여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도 모두 성경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 당시의 성경공부와 차이가 없는 것 같아보였습니다.
성경은 믿음에 의해 해석되지 공부를 해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자를 연구하고 시대상황 등을 연구함으로써 성경을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은 성사(聖事)입니다.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진리가 눈에 보이는 문자 안에 숨어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세상 것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 성사인 것입니다.
성경도 성사이고, 성체도 성사이고, 하느님을 잉태하신 성모님도 성사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문자이고, 밀떡이고, 시골 처녀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참으로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문자 안에 진리가 있다는 믿음, 밀떡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믿음, 마리아 안에 하느님이 잉태되어 계시다는 믿음만이 필요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믿음으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자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로,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왔는데 그 물이 성령이요 그 바위가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으로 성경을 새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해석만이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고 이런 해석은 공부를 해서가 아니라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밀떡의 성분을 조사해보고 연구해봐야 그 안에서 예수님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도 그렇습니다.
말씀을 아무리 공부해봐야 거기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개신교도 그들 나름으로, 천주교도 그 나름대로 성경을 해석하지, 연구를 많이 한다고 자신들의 믿음에서 벗어나는 해석을 찾아내지는 못합니다.
아기는 포크를 보면 그것을 먹는 것인 줄 알고 입에 집어넣습니다.
아직 그것이 무엇에 사용될 수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각자의 믿음대로 모든 것을 해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경을 더 잘 알아듣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더 충만하게 되는 것이 필요하지 자세한 역사적 배경이나 쓰이게 된 동기 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성서학자들이 반대하더라도 저는 이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은 목숨까지 걸 수 없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과 맞설 수 없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혼자라도 외롭지 않습니다.
의견은 자신도 이웃도 변화시킬 수 없지만 믿음은 자신도 세상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소경 바르티매오가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쳤습니다.
하도 그러니 많은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는 거지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으면 먹을 것도 얻지 못할 수 있지만 이번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의 모든 의견과 맞섰습니다.
마치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를 계속 들으면서도 그러면 안 되어서 가라앉는 배에서 혼자 뛰쳐나오는 사람과 같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모든 세상과도 맞설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이 그렇게 순교하였습니다.
바르티매오는 세상 사람들이 짓누를수록 더 크게 외쳤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미쳤다고 생각할 때까지 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그를 불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명예와 돈을 제일로 여길 때, 우리는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길을 갈 때 ‘이 길이 맞나, 틀리나?’를 생각하면서 간다면 비록 그 길이 맞아도 그 길을 가는 동안은 걱정과 불안에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삶에 확신을 줄 수 있고 흔들리지 않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세속적이고 합리적인 의견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진리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어야 하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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