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1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복음 : 루카 11,5-13
< 기도가 이뤄졌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다 >
한 네모가 있었습니다.
네모는 언덕 위에 올라가 아래로 구르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상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보다 더 빠르게 구르는 무언가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동그라미였습니다.
네모는 동그라미가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자신도 동그라미처럼 빠르게 구르고 싶다고 기도했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주님께서 그를 동그랗게 만들어주셨습니다.
동그라미가 된 네모는 너무 기뻤습니다.
이제 언덕에서 자신보다 빠르게 구르는 것들은 없었습니다.
세모와 마름모 등을 추월하며 우쭐해졌습니다.
그런데 너무 빠르게 구르다보니 천천히 구를 때 보였던 세상이 더 이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정신없이 지나가버렸습니다.
누구보다 빠르게 구를 수는 있었지만 삶을 즐길 수는 없었습니다.
어느 날 혼자 가장 앞서 구르던 다 닳아 아주 작게 되어버린 동그라미는 ‘하느님께서 그때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더라면 ... ’이란 후회스런 눈물을 흘렸습니다.
[참고: ‘언어의 온도: 동그라미가 되고 싶었던 세모’, 이기주]
만약 주님께서 네모가 그때 그렇게 청하던 것을 들어주시지 않으셨다면 네모는 더 이상 하느님을 믿지 않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청을 들어주실 때 꼭 좋아서 들어주시는 것만은 아닙니다.
당신이 원치 않으셔도 어쩔 수 없이 들어주셔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가 이젠 밥을 먹어야 할 때가 되었음에도 계속 젖만 먹겠다고 떼를 쓸 때 한 번만 더 젖을 먹여주는 부모의 심정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한때 임금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이 유일한 임금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임금이 있는 다른 나라들이 부러워 사무엘에게 와서 하느님께 임금을 보내달라고 쉼 없이 청했습니다.
사무엘이 그들을 말렸으나 그들의 청은 너무도 강력하였습니다.
이에 하느님은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주라고 허락하시며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1사무 8,7)
오늘 복음엔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청하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아무 것도 청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나쁜 일입니다.
하지만 무조건 청하기만 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선 예수님께서 무엇을 청해야하는지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즉, 우리가 청해야하는 것은 ‘성령님’입니다.
예수님은 이 성령님을 오늘 복음에서 ‘빵 세 개’와 비유하십니다.
한 밤중에 벗에게 찾아와 빵 세 개만 꾸어달라고 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먹을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찾아온 벗에게 내어줄 세 개의 빵을 청합니다.
그렇다면 이 빵 세 개가 바로 성령님의 상징인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빵 세 개는 결국 자신은 물론 이웃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는 성령의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실 때 그 유혹을 무엇으로 이기셨을까요?
바로 기도로 얻은 성령의 힘으로 이기셨습니다.
우리는 복음말씀을 통해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한 것이 ‘세 가지’임을 잘 압니다.
우리는 이것을 간추려 ‘삼구(三仇: 세 가지 원수)’라 부릅니다.
그 원수를 받아들이면 뱀이 되고 전갈이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뱀과 전갈을 이기는 성령의 세 가지 힘인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뱀과 전갈은 남을 아프게 하는 본성을 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뱀과 전갈의 본성을 이길 수 있는 성령의 세 힘을 우리는 ‘복음삼덕(福音三德)’이라 부릅니다.
삼구인 세속-육신-마귀를 이길 수 있는 성령의 세 힘은 가난-정결-순명인 것입니다.
결국 주님께 기도 안에서 꾸준히 청해야만 하는 것이 우리 자아가 자아내는 육체적 욕구를 이길 수 있는 힘인데, 어떤 때는 그 육체적 욕구를 더 증가시키는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가끔 들어주실 때가 있지만 그것은 그 사람을 그렇게라도 당신 품에 잡아놓기 위함이지 결코 주님께서 좋아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유일한 축복은 ‘십자가’이고 그 십자가에 우리 자아를 죽이는 것만을 기뻐하십니다.
욕구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자아의 욕구가 일지 않으면 참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내 세속적인 욕구를 증가시키려는 기도를 이젠 그만해야겠습니다.
오히려 오직 믿음만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용기를 청해야겠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원하고 청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성령님’뿐입니다.
성령님의 가치를 아는 이만이 성령님만을 청할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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