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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0월 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10-03 조회수 : 464

10월3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복음 : 루카 9,57-62 
독서 : 욥기 9,1-12.14-16 
 
< 양립할 수 없는 두 욕구 > 
 
영화 ‘안시성’에 고구려 신녀가 한 명 등장합니다. - 영화 줄거리가 들어있습니다 – 고구려 수호신인 주몽의 활을 지니고 있으니 보통 신녀는 아니었나봅니다. 
환시를 통해 미래를 본다는 이 신녀는 어렴풋하게나마 안시성의 몰락을 보게 됩니다.  
 
그녀가 원하던 것은 자신이 사랑했던 안시성 성주 양만춘의 안위입니다. 
안시성이 항복만 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당나라 황제의 말에 신녀는 목숨을 걸고 성주를 설득하려고 합니다.  
 
5천 밖에 안 되는 안시성 군사들이 20만이 넘는 당나라 군사들과 맞서 싸우며  지쳐가던 때였습니다. 
성주도 이제 당 태종의 마지막 공격 앞에서 처음 가졌던 기개를 잃어갑니다.  
 
그래서 자신을 살리고자 하는 신녀를 반역죄로 칼로 칠 수 없습니다. 
그도 사랑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성주를 시해하기 위해 들어왔지만 결국 성주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한 사물이란 사람이 그녀의 목을 벱니다. 
싸움을 멈추게 만드는 욕구를 계속 자아내는 그 신녀를 살려두고는 안시성의 모든 군인들의 패기가 떨어질 것이기에 개인적인 사랑은 접어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그녀의 목을 베고 다시 전의를 불사릅니다.  

우리 안에는 이렇게 양립할 수도 없고 양립해서도 안 되는 두 욕망이 있습니다. 
내 욕구와 하느님의 욕구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자기 자신과 화해하라고 말합니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이것이 욕망과 관련될 때는 큰 문제가 제기됩니다.  
 
심리학은 인간의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하는데 세속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과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진리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특별히 심리학에서 정의하는 ‘자아’는 각자의 방식대로 설명이 되어 어떤 이들은 자아가 내 자신이라고 하고 그 자아의 욕망에 어느 정도는 맞춰줘야 정신이상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허용되는 정도는 그 욕망을 풀어주고 지나치게 율법적으로 자아의 욕망을 억누르지 말라고 합니다.

일면 맞는 말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맞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아와 참 자신과 구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아를 참 자신과 동일시하면 우리 입장에서는 하와와 뱀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뱀은 참 나의 육체적 욕구에 불과합니다. 
그 육체적 욕구를 너무 억압하면 사람이 미쳐버릴 수 있다고 하여 육체적 욕구와 어느 정도 화해하라는 말은 어느 정도는 죄를 지으며 살라는 말과 같습니다. 
매우 위험한 가르침입니다.  
 
만약 안시성 성주가 신녀와 화해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신과 성 주민들은 당나라 군대에게 몰살당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의 욕구와는 절대 화해해서는 안 됩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순백의 토가를 새빨간 선혈로 물들이며 줄리어스 시저는 그렇게 쓰러졌습니다. 
광란의 상태에서 그를 찌른 암살자들은 모두 열네 명.  
 
그들은 모두 한 때 시저와 반대편에 서서 그에게 칼을 겨누었던 인물들이었지만, 내전에서 승리한 시저가 그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해 준 이후 그를 도와 일하게 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저가 베푼 관용은 비수로 돌아와 그의 심장에 꽂히고 말았습니다. 
그는 지나간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지만, 암살자들은 그러한 그의 뜻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우리 안의 악이 선으로 돌아오는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그러면 쟁기를 놓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소의 힘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소는 앞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 뜻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내가 뒤를 돌아보는 것은 나의 뜻입니다.
뜻을 다른 말로 바꾸면 욕구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과 내(자아)가 원하는 것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합니다.
문제는 이 두 욕구가 양립할 수 있다고 믿는데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형사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악의’에 ‘노노구치 오사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문단에 등단하기까지 줄곧 ‘히다카 구니히코’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결국 그를 살해함으로써 그의 육신뿐 아니라 작가로서의 성취까지 모두 지워버리려 했습니다.  
 
이에 ‘가가 형사’는 노노구치가 자백했음에도 그가 살인을 한 진짜 동기에 대해 추적하던 끝에, 그의 ‘악의’가 바로 살인의 진짜 동기임을 밝혀냅니다. 
노노구치는 히다카로부터 어두운 과거를 용서받고 그의 도움으로 작가의 꿈 또한 이룰 수 있었지만 그것을 굴욕과 패배로 받아들이고 그 ‘악의’를 주체하지 못한 끝에 히다카를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출처: ‘친구 혹은 은인, 그 양립할 수 없는 두 이름’, jinks30님의 블로그]

선의와 악의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하나가 강하면 다른 하나는 약해집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소의 힘은 약해집니다.  
 
자아의 욕망에 자꾸 시선을 주다보면 주님이 바라시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자아의 욕구와 화해해서는 안 됩니다. 
죽기까지 싸워 이겨야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자아의 욕구는 그 자체로 ‘악’이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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