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6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잠언 30,5-9
복음: 루카 9,1-6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중용은 주님이 원하시는 한계 안에 머무는 것>
지구에 인간이 살고 있고 지구 외에 다른 생명체가 공식적으로 발견된 것은 지금까지는 하나도 없습니다.
왜 태양에만 생명체가 살 수 있을까요?
다른 별로 옮겨가면 왜 살 수 없을까요?
지구는 있어야 할 딱 그 자리를 넘지도 모자라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태양 쪽으로 조금만 앞으로 가도 우리 모두는 타버리고 조금만 뒤로 가면 얼어버립니다.
우리 삶에서도 모든 면에서 이 가장 적당한 중용의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 자리를 모르기 때문에 타버리기도 하고 얼어버리기도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돈을 너무 많이 축적하여 이웃을 배고프게 만들고 자신은 그 돈을 다 쓰지도 못하고 죽기도 합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태어나자마자 배고픔과 씨름해야 하고 결국 3천 원짜리 주사가 없어 병에 걸려 세상을 뜨고 맙니다.
그리고 부자는 부자 나름대로 더 벌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이런 처지를 한탄하며 나누지 않는 이들을 원망합니다.
이런 모든 차별적인 세상이 하느님이 만드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가장 적당한 자리가 어딘지 몰라 헤매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바로 이 자리가 구체적으로 어디를 말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입니까?
그저 오늘 살아갈 수 있는 것만 청하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양이 가장 적당한 양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청합니다.
특별히 ‘오늘’이라면 ‘내일’ 또 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만 먹고 내일은 안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존의 눈물’ 다큐에서 그 원시적 삶을 살아가는 부족들이 ‘오늘’ 먹을 양만 수집하면 시간이 많이 남아도 사냥을 멈추고 돌아오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저 배고프지 않을 정도, 헐벗지 않을 정도, 이슬을 맞지 않을 정도만 가지고 살려는 마음을 갖는다면 이 세상 자체가 곧 하느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빼앗으려 하지 않고 쌓아두려 하지 않으며 배고픈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왜 중용의 자리를 벗어나 너무 극단적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들의 풀도 솔로몬보다 잘 입었고 하늘의 새도 먹이시는 하느님을 믿고 내일 걱정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내일 걱정을 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고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맡기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믿음이 없으면 지나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구는 우주로 튕겨져 나가려는 힘과 태양의 끄는 힘 중간에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습니다.
우주로 튕겨나가지도 않고 태양으로 빨려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지구가 우주와 태양의 중심에 서서 균형을 잡는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의 중심에 서서 균형을 잡아야합니다.
그리스도는 타볼산에서 변모하시어 완전히 하느님과 같이 되셨지만 또한 세상으로 내려오시어 바로 마귀 들린 아이를 치유하십니다.
타볼산에 눌러 앉지도 않으시고 기도를 한다고 사람을 멀리하지도 않으십니다.
체조경기 중 평균대는 높이 125㎝, 길이 5m, 폭 10㎝ 나무 위에서 펼쳐집니다.
선수들은 90초간 그 좁은 평균대 위에서 뛰고 돌고 구르며 연기합니다.
바로 그 좁고 긴 자리를 벗어나면 실격 당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나의 자리에 집중하는 것이지 그것 없이 공중돌기만 하다가는 떨어지기 십상입니다.
어떤 운동이든 공을 끝까지 보지 않으면 잘못 맞아 원치 않는 곳으로 공이 날아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공을 끝까지 보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공이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앞을 보다가 공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들은 현재, 바로 이 시간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을 매우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저축을 하고 보험을 들고 미래를 걱정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면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가 어떤 자리에 머물러야 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얼마만큼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얼마만큼 들어야하는지,
얼마만큼 벌고 얼마만큼 나누어야 하는지,
얼마만큼 써야 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이 자리를 벗어나서는 무엇을 해도 의미 없는 행동이 됩니다.
결국 중용을 지키는 방법은 ‘바로 지금’ 그분께서 나에게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알아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벗어나게 된다면 오늘 독서에서 나오는 이런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