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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09-09 조회수 : 427

9월9일 [연중 제23주일] 
 
복음:마르코 7,31-37 
 
<​ 귀를 막아야 잘 들린다 >
     
어떤 부인이 수심에 가득 찬 얼굴로 한 정신과 의사를 방문하였습니다.
“선생님, 저는 더 이상 남편과 같이 살 수 없을 거 같아요. 
그 사람은 너무 신경질적이고 이기적이라 자기가 하기 싶은 대로만 하고 살아요.” 
 
그 말을 들은 의사는 싶은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 병원 옆으로 조금 가시다 보면 작은 우물이 하나 있답니다. 
그곳은 신비의 샘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 물을 통에 담아 집으로 들고 가십시오.
그리고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면 그 물을 얼른 한 모금 드십시오. 
그런데 절대 삼키면 안 됩니다. 
그렇게 실행 한다면 아마 놀라운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부인은 의사의 말대로 우물에서 물을 길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밤늦게 귀가한 남편은 평소처럼 아내에게 불평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부인도 맞받아쳤겠지만 그날은 의사가 가르쳐 준대로 신비의 물을 입안 가득히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물이 새지 않도록 입술을 꼭 다물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남편의 잔소리는 잠잠해 졌습니다. 
그 이후도 남편이 화를 낼 때면 부인은 어김없이 그 신비의 물을 입에 머금었고 그것이 여러 차례 반복되면서 남편의 행동은 눈에 띄게 변해갔습니다. 
신경질이 줄고 아내를 대하는 태도도 눈에 띄게 변해갔습니다. 
 
부인은 너무 기뻐 의사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러 갔습니다.
“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 그 신비의 샘이 너무도 효능이 좋더군요. 
우리 남편이 싹 달라졌다니까요.” 
 
의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남편에게 기적을 일으킨 것은 그 물이 아닙니다. 당신의 침묵입니다.”
     
아내의 침묵은 판단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로 남편은 이해받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럼 변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타인의 말을 잘 들어준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도 듣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나의 말을 하면서 타인의 말에 귀를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잘 들어주기만 해도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잘 유지될 것입니다. 
 
며칠 전 어떤 자매님과 이야기하는데, 그 자매님이 오랜만에 속 시원하게 이야기를 했을 때 옆구리 대상포진이 오던 것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는 말을 해 주셨습니다.  
 
엘리베이터에 아는 지인과 함께 탔는데 옆구리에 통증이 오는 것이 꼭 대상포진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던 자매는 곧바로 그 자매의 손목을 잡아끌고 내려 공원에 앉아서 장장 2시간 동안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당시 어려운 일들이 겹쳐있어서 힘들었는데 이야기를 하고 다음 날 일어나보니 통증이 전혀 없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잘 들어주는 것도 커다란 은총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남의 이야기에 잘 공감할 줄 모르기도 합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인데 영혼 없이 맞장구를 쳐 주기는 하지만 진정 함께 눈물 흘려줄 준비는 돼 있지 않은 자신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왼쪽 귀가 조금은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이야기를 들어주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유학할 때 귀 속으로 바이러스가 들어가서 신경을 죽였고 그만큼 이명이 생겼습니다. 
쇠 가는 소리가 계속 납니다. 
그때 평생을 이명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은 침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명이 큰 도움을 줍니다. 집중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젠 기도할 때나 일생생활 할 때 오히려 이명을 들으려고 노력합니다.  
 
이명을 들을 때는 다른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아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에도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장본인은 나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생각’을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타인과 대화할 때 내가 생각하는 대부분의 내용은 판단입니다. 
나의 귀를 막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어떤 말을 할 때 끊임없이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은 자신의 말이 끊임없이 판단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면 화를 내거나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됩니다.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은 치유해주십니다. 
그런데 먼저 그 사람의 귀를 당신 손가락으로 막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귀를 막으시는 것일까요? 
이미 군중에게서 그를 데려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이유는 아닙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시는 상징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자신과의 대화인 생각을 끊는 것이 잘 들어주는 것이고 잘 들어주는 것이 곧 잘 말해줄 수 있는 준비가 됩니다. 
참으로 의미 있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생각에 귀를 막아야합니다. 
내가 나에게서 떠날 때 상대의 말을 온전하게 공감하게 됩니다. 
 
영국의 위대한 인상파 화가인 죠셉 터너(Joseph M. Turner)는 거센 폭풍이 일어난 바다를 그린 그림을 완성하고 나서, 친구를 자기 화실로 초대했습니다. 
터너의 그림을 본 친구는, 감탄을 연발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대단하군! 완벽해! 아니, 자네, 이렇게 실감나는 폭풍우 장면을 그릴 수 있는 무슨 비결이라도 있나?”
     
터너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폭풍이 이는 바다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어서, 그는 바람이 거세기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한 바닷가로 찾아갔습니다. 
거기에서 터너는 고기잡이로 생활하는 한 어부에게 돈을 주면서, 다음에 폭풍이 일기 시작하면, 자신을 태우고 바다로 나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난 파도가 일어나기 시작할 때, 죠셉 터너는 어부에게 자신을 돛대에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터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나는 성난 파도와 폭풍우를 본 것이 아니라네. 
아마 폭풍우를 느꼈다고 말하는 게 옳을 걸세. 거센 폭풍우가 나에게 불어와서 어느새 내가 폭풍의 한 부분으로 그 안에 서 있다는 느낌을 느꼈단 말일세.”
어쩌면 진정으로 듣는다는 말은 그 말을 체험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생각이 끼어들면 그 말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제3자로 판단하는 입장에 서게 됩니다. 
제3자로 듣는 것은 영원히 남의 이야기로만 남게 됩니다. 
그러면 공감해줄 수 없고 상대와 친밀해질 수도 없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주님 말씀 안에 들어가 그 말씀을 체험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3자로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속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것이 내 목소리에 귀를 막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당신 침을 말 더듬는 사람의 혀에 발라주신 이유는 당신 말씀을 전하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체험되지 않은 말, 혹은 진정으로 이해되지 않은 말은 힘을 갖지 못합니다. 
체험한 것을 그리는 것과 멀리서 본 것을 그리는 것이 같을 수가 없는 것처럼 기도 안에서 얼마나 자아로부터 멀어져 주님 안에 머물렀느냐에 따라 더 깊은 묵상을 할 수 있고 더 충실히 그 의미를 전달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대변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렇듯 먼저 자아의 소리에 귀를 막을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자아의 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곧 유혹이고 자신 안에 갇히게 만듭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잘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생각을 멈추어 자신 밖으로 나와야합니다. 
자신 안에 갇히면 영원히 듣지 못하는 사람이요 말더듬이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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