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4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독서: 코린토 1서 2,10ㄴ-16
복음: 루카 4,31-37
<세상 것에 휩쓸리면 권위를 잃는다>
인도 설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바라문교인 한 사람이 제사에 쓰려고 산양을 사 가지고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악인 세 사람이 산양을 빼앗으려고 그가 오는 길목에서 각각 떨어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라문교도가 가까이 오자 첫 번째 악인이 그 앞에 나타나
‘오! 성자여, 당신은 무엇에 쓰려고 그 더러운 개를 메고 가십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자신이 가지고 가는 것은 산양이라고 대꾸합니다.
조금 후 두 번째 사람도 똑같은 말로 물어봅니다.
그러자 그는 의아심이 생겨 메고 가던 산양을 내려 살펴보고는 그제야 안심합니다.
조금 더 걸어가다 세 번째 사람을 만나게 되자, 그도 똑같은 말을 건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세 사람씩이나 그리 말하는 것을 듣고는 확신이 생겨 산양을 땅바닥에 버려두고 황급히 가버렸습니다.
물론 그 산양은 악인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바라문교도는 왜 자신의 확신을 잃게 되었을까요?
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자신을 ‘성자’, 즉 ‘거룩한 사람’이라 불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상대의 칭찬에 넘어가고 만 것입니다.
자신이 흔들리면 누구도 잡아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리더는 어떤 누구의 감언이설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진리를 지니고 있어야합니다.
뇌물 하나 받고 사람이 바뀐다면 그 사람의 말을 권위 있게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담은 하와가 주는 선악과에 흔들렸기 때문에 리더의 권위를 잃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권위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권위를 지니시고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 권위에 마귀들까지 복종하였습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을 만나면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 얼마나 달콤한 말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는 좀처럼 이런 신앙고백을 듣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이 말에 꿈쩍이나 하실까요?
예수님은 누구에게 영광을 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니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고 꾸짖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권위입니다.
하늘의 권위는 땅의 것에 영향을 받거나 휩쓸리지 않습니다.
역사 속에 잊혀진 사람으로 포시온이라는 그리스의 군인 정치가가 있었습니다(B.C 402~317)
그가 출전하여 마세돈의 필립을 무찌르고 비잔티움에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군중들은 포시온을 환영하기 위하여 아테네의 거리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포시온은 들은 채도 하지 않습니다.
포시온의 측근들은 그가 군중들에 기분을 맞추어 주지 못하고 있다고 충고했습니다.
그러자 포시온이 말했습니다.
“저들은 내가 교수대에 오를 때에도 저처럼 좋아할 것이다.”
그 후로 포시온은 자신에게 어떠한 명예가 주어져도 군중의 태도에 결코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포시온은 그의 논지를 들고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포시온이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연설을 하자마자 우레와 같은 환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 환호는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마침내 포시온은 그의 측근들을 돌아보며
“내가 그때 괜한 말을 했나보군.”하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 아테네의 시민들은 그에게 독약을 먹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포시온의 비참한 최후를 애도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하고 그를 추모하는 포시온 상을 세웠습니다.
리더는 이끄는 사람이지 이끌리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리더는 자신이 이끄는 사람들의 애정을 구걸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 애정을 잃지 않기 위해 선악과까지도 먹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위가 있으려면 남들의 평가에 좌지우지 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에 따라 휩쓸린다면 권위가 없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주어지는 권위를 유지하려면 땅에 것에는 절대 휩쓸리는 일이 없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권위가 있으셨던 이유는 땅의 것에 대한 애착이 전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는 만큼 권위를 잃습니다.
그만큼 흔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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