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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09-02 조회수 : 431

9월2일 [연중 제22주일] 
 
신명기 4,1-2.6-8
야고보 1,17-18.21ㄴ-22.27
복음 : 마르코 7,1-8.14-15.21-23

<마음을 보는 사람, 행위를 보는 사람> 
 
일본 핸드폰에는 ‘와리깡 기능’이 탑재된 것이 많다고 합니다. 
와리깡은 자신이 먹은 돈은 자신이 낸다는 더치페이와 같은 전통입니다.  
 
스마트폰의 와리깡 기능은 여럿이 음식을 먹었을 때 돈을 얼마씩 내야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사실 일본의 와리깡 정신에는 서로에게 피해나 부담을 주기 싫어 각자가 먹은 것은 각자가 내야한다는 합리적 사고가 들어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주기도 싫고, 받기도 싫다’라는 생각이 깔려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관계란 것이 주고받는 것이 특징인데 이런 사고 안에서는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한번은 KBS 방송국 일본 특파원이 자신에게 기사를 가끔 제공해 주는 어느 사람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그와 교제하고 싶은 마음에 하루는 그를 점심에 초대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며 아주 재미있게 식사를 했고 초대한 자신이 음식 값을 다 부담했습니다.  
 
그 기자는 자꾸만 자신이 먹은 것은 자기가 내야한다고 말하는 그 사람에게 한국인의 상식대로 웃으면서 “어휴, 그렇게 서운하면 다음에 언제 점심 사시면 되잖아요.”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그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점심을 함께 먹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자는 교재가 그렇게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음을 기뻐하며 기꺼이 그의 초대에 응했습니다.  
 
그 사람은 지난번 먹었던 그 식당에서 만날 것을 제의했고 지난번에 시켰던 음식을 주문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식사가 끝난 뒤 그 사람은 지난번에는 내가 폐를 끼쳤으니 갚고 싶다며 계산을 했습니다. 
그 기자는 ‘이제 저 사람과는 끝이구나.’하는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섰다고 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가 전체 일본인을 대표하지는 않습니다. 
저도 유학할 때 일본 신부님과 친했는데 그 신부님은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적이어서 음식을 함께 먹을 때 그냥 돈 있는 사람이 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그렇게 ‘와리깡 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피해를 준 것에 대해서는 결코 고개를 숙이거나 배상하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남에게 절대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속은 또 그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아마도 역사적인 영향이 컸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봉건 영주시대 사무라이들은 즉결 처분권이 있었다고 합니다. 
마음에 안 들면 목이 달아날 수 있는 상황에서 누구에겐가 피해를 주었는데 그 사람이 사무라이면 큰일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언행은 일절 하지 않아야 한다는 심성이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쓰나미에서 간신히 구출된 할머니가 구조대원들에게 한 첫 마디가 피해를 끼쳐 죄송하다는 말이었다고 하니 그들이 얼마나 이웃에 대한 배려가 큰 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은 전통입니다. 
전통은 외적인 행위를 규정하지 마음까지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웃지만 속에는 칼을 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외적인 행위보다는 내면을 더 중시해야합니다.
법이나 전통이란 것은 공익을 해치는 행위를 제어하여 사회가 병들지 않게 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 스스로 만들어낸 규제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해치면 그 사람은 사회에 해가 되어  그 사회에서 격리되거나 아예 추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법은 행위의 법이 아니라 마음의 법입니다. 
행위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통제하는 법인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모든 감정이 생겨나는데 거기에서 솟아나오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면 그에 따른 행동도 제어하기 힘들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 사람에게 해가 되는 감정이란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입니다. 
 
그런데 나쁜 생각들, 탐욕, 악의, 시기, 교만, 어리석음은 내적인 것이고,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사기, 방탕, 중상 등은 외적인 행위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외적으로 보이는 것도 실제로는 마음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마음만 일어도 불륜을 저지른 것이고, 도둑질, 살인, 간음, 사기, 방탕, 중상 등을 저지른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화만 내어도 살인하는 것이라 하셨고, 음탕한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런 모든 감정들은 행위로 드러나지 않고 마음만 품었어도 죄가 되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집중하며 살아야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각자의 마음에서 어떤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는지를 관찰해야합니다.  
 
이미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면 이미 살인을 하기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으로 음란한 생각이 일기 시작한다면 이미 간음을 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에서 이런 감정들이 솟아나지 않게 미리 규제하게 만드는 것이 ‘하느님의 법’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관심에 따라 두 부류로 나뉩니다.
행위를 관찰하는 사람과 마음을 관찰하는 사람입니다.  
 
행위를 관찰하고 행위에 집중하는 사람을 위선자라 부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인데 겉모양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관찰하는 사람은 외적인 행위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의 행위에는 거의 무관심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것도 바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따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보고 위선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릇은 깨끗이 닦지만 그 속은 더러운 것으로 채우는 이들입니다.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더 중요한 이들은 대부분 내면을 볼 수 있는 눈을 잃습니다. 
눈은 하나만 바라보게 돼 있습니다.  
 
내면을 보든지, 외면을 보든지. 우리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살펴 보아야합니다.
사람의 마음입니까, 아니면 외적인 모습입니까?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여 살지 않으면 스스로도 자신의 외적인 모습에 속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기쁨과 평화, 그리고 사랑이라는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있는지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겉과 속을 동시에 볼 수는 없습니다. 
상자를 열어서 안쪽을 보면 바깥쪽은 보이지 않습니다. 
속을 먼저 보아야 겉이 왜 그렇게 생겼는지 알게 됩니다.
일본에서 그리스도교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일본인들의 심성 자체가 외적인 행위에 고정돼 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외적인 것이 더 중요한데 그리스도교는 마음에만 집중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도 내면이 아닌 외면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면 그리스도를 믿어도 잘못 믿고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나에게 어떤 행위가 나오고 있는지를 보지 말고, 어떤 감정이 솟아나오고 있는지를 바라보는 사람이 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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